“만약 당신이 비 오는 날 공중전화 앞에 우두커니 서있다가 보라색 우산으로 얼굴을 가린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난 당신이 음료수와 친해지길 권하고 싶다. 음료는 시계이자 달력이고, 학교고, 집이고, 교회며 친구이자… 만두다.”

그래. 나 마시즘은 ‘무언가 마실 줄 아는 사람’이라면 이름 한 번 들어봤을 음료계의 슈퍼루키다. 많은 음료회사의 러브콜을 받는 나의 명성은 차고 넘쳐 식품업계까지 흘러간 듯하다. “아 저희가 음료 브랜드는 아니고요…” 보라색 우산을 쓴 사람은 자신을 소개한다. ‘롯데푸드 광고 담당자’라니. 누구냐 넌.

나는 그를 만나 어느 미팅룸에 들어갔다. 도대체 푸드 업계에서 나를 부른 이유가 무엇일까? 담당자는 잠시 할 일이 있다며 자리를 비웠다. 그제야 긴장이 풀렸는지 졸음이 온다. 눈을 떠보니 방안에는 만두가 담긴 접시 하나가 들어와 있었다. 아아 설마 이것은! 올드보이잖아 꺄르르.


그렇게 15시간 동안
만두만 먹은 마시즘

나는 즉시 손을 들어 불합리함을 토로했다. “올드보이는 찐만두가 아니라 군만두라고요!” 나의 날카로운 지적에 담당자는 한창 분위기 잡는데 찬물을 뿌리지 말라고 경고했다. 녀석 제법 진지하군. 나는 그저 정갈하고 절제된 언어로 감성 넘치는 음료 리뷰를 남기고 살았을 뿐인데… 마시즘을 시작하고 만나는 사람들은 왜 다 이럴까?

담당자는 내게 말했다.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다면 만두와 가장 잘 어울리는 음료를 찾으시오.” 하지만 이 정도는 장차 음료계의 거목이 될 나에게 너무 쉬운 일이다. 나는 이곳만 나간다면 담당자의 정체까지 찾아내겠다며 다짐을 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찐만두와 군만두는 반반으로 주세요.”


들어 본 적 있어? 만맥
만두 X 맥주

게임은 시작되었다. 15년 동안 먹은 군만두의 맛을 기억하려는 올드보이처럼 나는 만두를 천천히 음미해본다. 중국집에 배달을 시켰다면 젓가락 포장에 표시라도 있을 텐데, 담당자는 마트에서 사 온 만두를 직접 요리하는 철두철미함을 보였다. 하지만 그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만두의 인상착의가 특이한 것이다. 우리가 아는 만두는 반달 모양인데, 이 녀석은 전병처럼 생겼다. 똑똑히 기억해주마. 냠냠.

“거… 거 만두만 먹지 말고 음료를 말하라니까.” 담당자의 아우성에 나는 ‘맥주’를 말했다. 사실 뻔한 대답이다. 맥주와 안 어울리는 음식이 어디 있겠어. 그는 김 빠진 맥주처럼 실망한 듯 냉장고로 향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큰 그림이 숨어있다.

애초에 나는 그가 롯데푸드에서 나온 광고 담당자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나의 명성을 시기한 측근의 장난이 아닐까? 기억이 나는 만두덕후는 2명이다. 한 명은 중식, 다른 한 명은 일식이다. 그 둘은 모두 만두를 좋아하지만, 서로 다른 맥주 취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담당자가 가져온 맥주는 ‘아사히’였다.

“덕후의 심장을 떨리게 만들 미니 사이즈 아사히! 역시 그럴 줄 알았어 당신 XXX 친구지?”… 아니었다. 한참을 혼난 후 다시 진지하게 만두와 음료 탐험을 하기로 했다. 아 네 죄송합니다.


동서양의 콜라보레이션
만두 X 와인

한 가지 고백할 것이 있다. 나는 만두를 좋아하지 않는다. 보통 맛있는 만두의 맛은 마늘이 결정한다. 하지만 나는 마늘의 아린 맛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만두는 아린 느낌이 없어 좋았다. 담당자가 이건 보통 만두보다 마늘이 2.5배 더 들어갔다고 자랑하기 전까지는… 와 이건 드라큘라도 속고 먹겠는데?

분한 마음에 이번 음료는 ‘와인’으로 시켰다. 호불호가 갈리는 조합이지만 만두와 와인은 제법 잘 어울린다. 바삭바삭한 군만두는 목 넘김이 좋은 화이트와인이, 속이 꽉 차고 담백한 찐만두에는 쌉싸름한 레드와인이 어울린다. 후후 담당자 녀석 어떤 와인을 사 올까? 물론… 내가 마시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고.

그가 사 온 와인. ‘디아블로 까베르네 소비뇽’이다. 1초에 1병씩 팔린다는 레드와인. 그만큼 어디서든 가까이에서 구할 수 있고 나 같은 와알못도 즐길 수 있을 정도로 가성비가 좋다. 그가 봉투에서 꺼낸 와인에는 뾱뾱이가 없었다. 그렇다면 마트가 아닌 편의점에서 샀겠군! 나는 이곳이 편의점… 그것도 세븐일레븐과 아주 가깝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시즘을 구하고 싶다고? 지금 세븐일레븐 근처로 달려와주라(전국에 세븐일레븐 편의점은 약 9326곳이 있다).


음식의 완성은 요구르트
만두 X 요구르트

벌써 2접시나 비워진 만두. 하지만 담당자의 성에 차지 않았다. 그는 이번에 음료를 먼저 말하라고 했다. “음… 글쎄요 요구르트가 먹고싶… 아니 어울릴 것 같은데” 그는 다시 만두를 요리하러 간다. 요리왕비룡 만두장인도 울고 갈 살신성인. 나는 이번에야 말로 만두를 잘 먹고 남은 담백함을 요구르트로 씻어내겠다고 다짐했다.

아뿔싸. 담당자가 가져온 것은 파스퇴르에서 만든 ‘바른목장 요구르트’였다. 파스퇴르 선생님… 나는 오랜만에 (내 맘대로) 은사님의 이름을 불러보며 애틋함에 빠진다. 분홍색 요구르트로는 항상 모자랐던 2%가 채워진 용량. 상큼한 맛 뒤에 숨겨진 우유맛의 베이스. 이거야 말로 만두와 어울릴 음료라고 생각했… 는데 어딘가 모자란 느낌이 들었다. 이 공허함의 정체는 바로 만두피였다.

요즘 만두는 속을 중요시한다. 하지만 이 녀석은 피에 신경을 쓴 만두였다. 씹으면 씹을수록 농구공 튕기듯 쫄깃한 만두피. 이것의 정체는 라이스페이퍼다. 속만 알찬 만두피가 웃옷을 입지 않은 헬스보이라면, 이 녀석은 패션 기능을 탑재한 몸짱. 패완몸. 그 자체였다.


중화요리계의 치트키
만두 X 고량주

나는 (이제야) 궁금해졌다. 담당자는 ‘만두와 어울리는 음료’를 말하라고 했지만, 사실 이 만두가 가진 잠재력의 끝을 시험해보고 싶은 것은 아닐까? 그래서 주문한 것은 빼갈… 아니 중국 고량주다. 강호의 치트키로 너를 상대하겠다!

고량주와 만두들이 입속에 들어간다. 뭐랄까. 용호상박이었다. 바삭한 만두의 고소한 존재감은 고량주가 들어오니 한순간에 사라졌다. 마치 군만두가 몸속에서 다시 튀겨지는 기분. 태어나서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열정 비슷한 게 느껴진다. 이어서 찐만두와 고량주를 먹어보았다. 담백하게 내 몸에 달라붙었다가 고량주와 함께 사라져 버린 만두여. 아아 보고 싶다.

그렇다. 나는 고량주 몇 잔을 마시다가 뻗었다. 만두 맛에 눈이 멀어 내가 알콜 저질이라는 사실을 깜빡하다니.


같은 만두라도
음료에 따라 다르다

담당자는 다시 빈 접시를 수거해간다. 나는 방에 우두커니 앉아 그동안 먹었던 만두들을 떠올린다. 중국집에서, 학교급식에서, 편의점에서 먹었던 만두들은 어떤 음료와 마셨던 거지? 음료만 다르게 즐겼을 뿐인데 같은 만두가 이렇게 다른 풍미를 보여준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았다.

사실 나는 답을 말하지 않고 있다. 담당자에게 부탁하지 않아도 내 가방에는 ‘콜라’가 있었으니까. 물론 한동안 콜라라는 정답은 입밖에 내지 않을 작정이다. 그러기에 이곳은 너무도 따뜻하고 담당자는 친절하다. 무엇보다 이곳을 나가게 되면 겉은 쫄깃하고 속은 알찬 전병처럼 생긴 만두를 다시 만날 수 없을 것 같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