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추가 가득한 시장을 걷는다. 떨이를 노리지도, 흥정을 하지도 않는다. 그가 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 김장을 마치고 마실 음료수다. 마미손을 낀 이모는 말한다. “그는 국가가 허락한 유일한 김장머신, 마시즘이다”

국립국악원

시골에는 다른 의미의
신상 음료가 있다

엄마의 ‘김장 2019 빈티지’가 만들어지는 시기가 왔다. 김장날, 오늘은 속세에 나간 모든 가족이 모이는 날이다. 버스 창밖의 풍경이 빌딩에서 나무로, 나무에서 숲으로 바뀌어 간다. 뭐랄까. 화면보호기 보는 기분이야.

추억에 푹 절여진 마시즘. 발이 땅에 닿기 무섭게 가게에 들어간다. 물론 음료수를 마시기 위해서다. 예전에는 음료 선택지가 너무 없어서 싫어했던 이 가게.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한 음료수들이 있다. 아침햇살, 초록매실, 비락식해, 갈아만든… 생배 주스? 엥? 이… 이거 옛날 옛적에 사라진 음료 아니냐?!


전설의 카피캣… 아니
시대를 간직한 음료를 발견하다

(너무 멋있어서 슈퍼카에 태워보았다)

‘버스를 타고 내가 시간여행을 한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생배 갈아만든 주스’는 지난 <갈아만든 배 VS 갈아만든 모든 것>에서 언급했던 ‘갈아만든 배’의 미투 제품이다. 무한 복제품의 양산에 서로 모두 사라진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 전설 중에 하나를 만난 것이다.

나는 이 ‘카피 전쟁’의 생존자를 급히 장바구니에 담았다. 당시에는 ‘따라쟁이’라고 놀림받았었을 텐데, 지금은 오리지널보다 귀하게 느껴진다니. 역시 인간 세계도 음료 세계도 ‘짬’이 최고야.


No More Idh
생배 갈아만든 주스

(전설의 고향 느낌으로 돌아왔다, 생배 갈아만든 주스)

‘갈아만든 주스’ 아니 ‘생배 갈아만든 주스’ 아아 ‘싱그러운 생배…’에라이 가독성이 떨어지는 이 녀석은 ‘갈아만든 배’의 인기로 만들어진 후발주자다. 포장에 그려진 배, 빨간 상자에 적힌 하얀색과 노란색의 글씨까지 갈아만든 배와 비슷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니 디자인이 몇 번 바뀐 ‘갈아만든 배’보다 원작의 분위기를 잘 담고 있었다. 히든싱어에서 가수를 이긴 모창 참가자를 보는 기분이랄까?

생배 갈아만든 주스를 들고 나서다가 문제가 생겼다. 사실 이 녀석을 집까지 무사히 들고 가려고 했으나, 갈증이 난 것이다. 그래. 조금만 마셔보고 흘리지 말고 집에 가져가면 되니까. 칙. 생배 갈아만든 주스의 뚜껑이 열렸다.

생배 갈아만든 주스에서는 탱크보이 녹인 맛이 난다. 이름처럼 갈아만든 배 알갱이의 맛도 느껴진다. ‘갈아만든 배’가 고운 배의 알갱이가 느껴진다면, 조금 더 까슬까슬하게 넘어갔다. 살짝 시큼한 느낌까지 살려서 진짜 배에서 나온 것임을 알려주는 듯했다. 이 정도라면 충분히 괜찮은 배 주스인걸. 주변에 없어서 그렇지.


1+1로 승부한다
싱그러운 생복숭아 주스

(솔직히 말해 봐 김장하기 싫어서 이랬지?)

‘생배 갈아만든 주스’를 맛있게 비웠다. “한 모금만 마시려고 했는데…”라는 말은 마시즘과 음주자에게는 비겁한 변명일 뿐이다. 사실 내 몸은 이런 사태가 벌어질 줄 알고 한 캔을 더 샀었다. 똑똑한 녀석.

내가 산 것은 ‘생복숭아 주스’다. ‘갈아만든 배’ 역시 시작은 ‘갈아만든 홍사과’였고, 복숭아, 딸기 버전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더욱 반가웠다. 과연 복숭아를 갈아만든 주스는 어떤 맛일까?

망했다. 생복숭아 주스는 갈아 만들지 않았다. 살펴보니 캔 어디에도 갈아 만들었다는 문구는 없었다. 포장이 비슷하길래 ‘갈아만든’ 것이 컨셉인 줄 알았는데! 갈아 만들지 않았다고 해서 품질이 떨어지는 주스는 아니었다.

황도 국물을 주스화 한 느낌이 가득 났다. 끝에는 딸기향이 비슷하게 느껴져서 좋았다. 비록 갈아 만들지는 않았지만, 싱그러웠다.


음료 신상털이도 때론
이야기의 때가 묻은 녀석이 좋다

김장도 하기 전에 보람찬 하루였다. 과거에는 마실 음료수가 없다고 투정을 부리곤 했는데, 이곳이야 말로 별천지였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지난 마시즘의 댓글처럼 단종된 캡틴큐를 만날 수 있지도 모른다. 신상을 찾아 편의점과 마트를 떠돌던 음료계의 신상털이 마시즘. 이제 새로운 던전을 찾았다. 고향사랑. 음료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