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하던 사랑을 마침내 받게 되었을 때의 그 심정은 숨이 다하는 날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지난날 죽어라 쏟아붓기 바빴던 무용한 시간들이 일순간 쓸모를 얻어 빛을 발하는데, 원하던 사랑을 받아 본 적 없는 이는 결코 이 감각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국립국악원

신비롭고 아름답기 그지없다. 무엇 하나 내게 바라는 건 없이, 마치 기둥 한쪽을 잃은 건물이 무책임하게 기울듯 내게로 넘어지는 사랑의 주체는 너무도 아름답고 황홀해서 나는 뭐라도 되고 싶었다. 그게 무엇이든 그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받은 사랑에 최대한의 예우를 갖추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삶은 눈을 감고 귀를 막는 일이 지나치게 잦았다. 간절한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발화자의 입도 제대로 찾지 못했다. 그리하여 나는 여전히 수년째 그 사랑에 제대로 된 보답 한 번 하지 못하고 있다.

늘 꿈의 언저리를 서성이고, 지나치게 긴 수면으로 꿈을 꿈으로 대신한다. 삶이 자꾸만 눈을 감고 귀를 막아 내 노력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다 탓하면서. 그러니까 나는 지금 받은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은 하며 살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 이 말을 아주 크게 발음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러지 못할 것 같다. 심영호 그를 만났기 때문이다.

심영호 씨와 대화를 나누기 전부터 나는 그가 저 감각을 이해하고 있을 사람이라는 걸 직감했다. 그의 아내 때문이었다. 인터뷰를 요청하고자 접촉을 시도했을 때 내게 처음 응답한 건 바로 그녀였다. 그녀는 심영호 씨를 “토마토의 고수” “토마토에 진심인 남자”라 말하며 인터뷰 또한 잘 해낼 것이라는 신뢰를 적극적으로 표했다. 나는 감탄해 마지않았다.

이토록 견고한 신뢰라니. 그건 웬만한 노력으론 좀처럼 얻을 수 없는 것이었기에 나는 심영호 씨가 몹시 부러우면서도 궁금해졌다. 받은 사랑에 어떤 보답을 해야 그런 신뢰를 얻을 수 있을까. 언제까지고 그를 궁구해 어떻게든 알아내고 싶었다. 그리고 그러면서도 나는 기대했다. 그런 신뢰와 사랑을 받는 남자는 과연 어떤 이야기를 할까. 그가 가꾸는 대저 토마토는 또 어떤 맛을 낼까. 내게 먼저 인사를 전하는 그의 다정함에서부터 차근차근 알아볼 생각이다.

토마토
심영호 농부의 하우스

심영호 반갑습니다 작가님. 심영호입니다.

전성배 안녕하세요. 농부님. 평일에는 다른 일정으로 부득이하게 주말에 시간을 내주시길 요청드렸는데, 흔쾌히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심영호 괜찮습니다. 주말에도 농장에 나와 일하고 있는 터라 평일이든 주말이든 사실 상관이 없었거든요. 이렇게 인터뷰를 제안해 주셔서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되레 조금 걱정되기도 하네요. 제 얘기를 한다는 게 익숙지 않아서요.

전성배 인터뷰라고 해서 특별한 이야기를 나눠야 하는 것은 아니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저 농부님을 너무나 궁금해하는 한 청년과 담소를 나눈다고 생각해 주세요. 그나저나 주말도 없이 농장에서 일하시는 건가요?

심영호 네. 대저 토마토가 수확되는 2월부터 5월까지는 농장에서 살다시피 합니다. 그 전에도 종자를 심고 가꾸고 해야 하니, 여름을 제외하고는 봄 가을 겨울에는 내도록 농장을 지키고 있죠. 50동이나 되는 하우스를 형님과 저 둘이서 관리하려면 이렇게 해도 부족하답니다.

전성배 그 넓은 재배 면적을 두 분이서요? 많이 고되실 것 같은데, 왜 인력을 안 쓰시고.

심영호 성출하 때는 매년 수확을 도와주시는 분들 몇 분과 함께 하지만, 그외에는 웬만하면 형제가 둘이서 관리하고 있습니다. 유지 비용을 절약하기 위한 것도 이유지만, 조금 까다롭게 농장을 관리하다 보니 저희 손으로 하지 않으면 현재의 품질을 균등하게 유지하기 어렵거든요.

전성배 그렇다 해도 그 넓은 면적을 두 분이서 다 하시다니.. 감탄밖에 나오지 않네요. 아, 품질을 먼저 이야기하시니 이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는데요. 최고 경매가를 달성하셨다지요? 고되더라도 두 분이서 손수 가꾸시는 이유가 있었네요.

심영호 맞습니다. 해마다 작황에 차이가 있어 무조건은 아니지만, 꾸준히 최고가 혹은 그 가격에 근접하게 계속해서 달성하고 있고, 최근에는 5kg 한 박스 기준 8만원대로 최고가를 달성했습니다. 경매가 자체가 워낙 높게 책정되다 보니 최종적으로 저희 대저 토마토를 사입하시는 한 소매 사장님은 최소한의 마진만 붙여 9만원대 초반에 판매를 하신다고 하더군요.

전성배 5kg이라고는 하나 판매가가 9만원대라니.. 익히 사모님을 통해 농부님의 대저 토마토가 최고가를 받을 정도로 상인분들 사이에서 유명하다고는 들었지만, 요즘 시중에 로얄 사이즈 기준 2.5kg 한 박스가 3만원대 초중반에 거래되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역시나 놀랍습니다. 

심영호 그렇죠. 그래서 저희 대저 토마토를 판매하시는 사장님들은 소비자분들께 경매가를 오픈해서 판매하실 정도랍니다. ‘심서방 짭짤이 토마토’라고 말하면서요.

전성배 저라도 그럴 것 같습니다. 쉽게 만나볼 수 없는 가격이니, 처음 농부님의 토마토를 보신 소비자분들은 분명 놀라실 테니까요. 경매가를 보여드려서라도 그만큼 대단한 토마토라 설명해야겠죠. 다시 한번 놀랍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대저 토마토를 기르고 계시길래 이런 가격이 가능한 걸까요? 말씀해 주실 수 있는 선에서 답변 부탁드립니다.

심영호 음.. 생각보다 특별한 방법을 쓰고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대저 토마토에게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광합성’과 ‘온도 관리’를 남들보다 좀 더 예민하게 하는 편입니다. 좀 더 라고는 했지만, 사실 남들이 보기에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예민하게 하고 있죠. 제가 농장에서 가장 신경 쓰는 건 토마토에게 주기적으로 볕을 쬐어주는 것과 하우스를 개방하고 닫는 것을 반복하며 온도를 관리해 주는 것 두 가지인데요. 토마토가 충분한 볕을 받으면서 추울 땐 춥고, 따듯할 땐 또 따듯해야 더 맛있어진다는 걸 많은 시행착오 끝에 알아냈기 때문이랍니다. 그 외에 까다로운 선별 작업도 한몫하고요.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그 정도겠네요.

전성배 마치 수능에서 좋은 성적을 얻은 학생이 교과서 위주로 공부했다고 말하는 것만 같습니다. 기본적인 걸 제대로 하는 것이 가장 좋다는 의미겠지요. 그럼 이런 품질은 아버님 때부터 이어져 온 걸까요? 3대째 대저 토마토 농사를 짓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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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영호 농부의 ‘심서방 짭짤이 토마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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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영호 농부의 ‘심서방 짭짤이 토마토’

심영호 네. 할아버지 때를 시작으로 아버지에 이어 저희 형제가 대저 토마토를 짓고 있습니다. 원래는 아버지와 함께 셋이 하다가 4~5년 전부터는 아버지가 한발 물러서시고, 온전히 저희 형제 둘이서 농사를 주도해 나가고 있죠. 이만한 품질을 얻게 된 건 저희 형제가 본격적으로 농사에 뛰어들었을 때부터입니다. 제가 지금의 아내를 만나 수년의 연애 끝에 결혼을 했을 때이기도 하죠. 생각해 보니 1등이 될 수 있었던 건 아내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전성배 안 그래도 농부님과 아내분의 이야기가 궁금했습니다. 농부님이 사모님에게 엄청난 신뢰와 사랑을 받고 있다고 느껴졌거든요.

심영호 고마운 사람입니다. 생각하신 것처럼 저를 많이 사랑하고 믿어주죠. 무엇 하나 없이. 되레 빚만 잔뜩이던 젊은 시절의 저와 결혼해 여태껏 응원해 주고 있는 사람입니다.

전성배 그 사랑을 조금 더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심영호 저와 이 사람이 처음 만난 건 제 나이 서른한 살 때입니다. 당시 저는 일찍이 형님과 함께 아버지의 농사일을 도우며 지내고 있었고, 지난날 닥친 IMF의 영향으로 많은 빚을 갖은 채였습니다. 당시만 해도 토마토 농사는 밥벌이만 겨우 할 정도로 수익성이 좋지 않아서 빚은 몇 년째 요지부동이었죠. 그리고 그런 와중에 이 사람을 만나 4년을 넘게 연애를 했습니다.

전성배 지금 제가 만나고 있는 여인과 보낸 시간과 같네요.

심영호 그럼 작가님도 이해하실 것 같습니다. 어느 정도 나이가 찬 남녀가 긴 연애를 하다 보면 자연히 결혼 적령기가 되고, 이제는 결혼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가 없는 순간이 온다는 것을요. 하지만 그때도 저는 여전히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이를 솔직하게 말하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었던 때라 그저 할 수 있는 말을 했습니다. 너를 사랑한다 말했던 횟수만큼 결혼을 꿈꾸기는 했지만 내 직업이, 내 사정이 변변치 않아 함부로 결혼을 하자 말하지 못 하겠다고. 내 비루한 사정이 말해서는 안 된다고 격하게 내 앞을 막아선다고.

“결혼하자 오빠.”

그 말을 하더군요. 괜찮다면서. 그저 제가 좋다며 함께 살자고 그 여자가 그러더군요. 작가님도 아실지 모르겠지만 당시만 해도 농부라는 직업은 인식이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젊은 놈이 할 게 없어서 농사를 짓냐”라며 주위 어른들이 말하던 시절이었죠. 그럼에도 이 여자는 제가 좋다며 결혼을 하자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빚도, 직업도 괜찮다고. 그렇게 결혼을 했고, 그녀와 저 사이에 아이가 생기면서 생각했습니다. 더 이상 밥만 먹을 수 있을 정도론 안된다고. 더 나은 삶을, 더 나은 미래를 아내와 아이에게 가져다주어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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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영호 농부

전성배 남편이 되고, 아버지가 되면서 받은 사랑에 대한 책임감이 토마토를 변화시킨 결정적인 이유였군요.

심영호 그렇습니다. 때마침 대저 토마토의 진가가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하던 시점이기도 해서, 보다 더 맛 좋은 토마토를 재배할 수 있다면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토마토에 대해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아버지에게 배운 기존 농법에서 어떤 걸 고치고 어떤 걸 추가해야 더 좋은 품질의 토마토를 더 안정적으로 재배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면서. 그때 지금과 같은 방법을 고안한 것이고요. 구체적으로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습도와 온도 일조량 등등 기존에 제시되던 수치를 조금씩 다르게 함으로써 지금과 같은 토마토를 만들었습니다.

전성배 기존과 다른 방식이라면 가족들과의 의견 마찰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심영호 네. 아버지와 형님이 가장 크게 우려하셨죠. 기존에 하던 방식으로도 충분히 좋은 토마토를 재배하고 있었는데, 굳이 그 방식을 바꿀 필요가 있겠냐고.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남들은 하우스 문을 꽁꽁 닫고 따듯한 온도를 유지할 때 저는 하우스를 개방해 온도를 낮추는 짓을 하니 답답하기도 하셨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확신이 있었고, 다행히 어머니만큼은 전적으로 저의 뜻을 따라주셔서 변화를 밀어붙일 수 있었습니다. 결과는 작가님도 아시다시피 경매가 1등 대저 토마토로 되돌아왔죠. 이로써 “영호가 하고 싶은 대로 하렴” “나는 너의 뜻을 따르마”라고 말씀하셨던 어머니의 믿음을 지켰고, 이제는 밥벌이 이상을 하며 아내와 아이들에게 더 나은 삶과 미래를 어렴풋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전성배 농부님께는 아내와 자녀분들에게 받은 사랑뿐 아니라 어머니의 사랑도 있었던 거네요. 그리고 결국 농부님의 뜻을 따라준 아버지와 형님의 사랑도. 문득 농부님이 하신 일련의 이야기가 제게는 마치 받은 사랑에 대한 예우란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저는 좀처럼 그 예우를 다하지 못하고 있거든요. 늘 문제를 외부에 두고, 자기변호를 하기 바쁘죠. 어쩌면 문제는 저한테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원래 인터뷰 말미에는 농부님들께 공통적으로 글을 보실 소비자분들과 독자분들께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지 여쭙는데요. 농부님은 이미 충분히 인정받는 대저 토마토를, 스스로를 끊임없이 채찍질하며 기르고 계시니 농부님께는 다른 말을 요청드리고 싶습니다. 그녀. 아내분께 하고 싶은 말을요. 어쩌면 지금의 농부님이 일군 모든 것의 시작일 지도 모를 그분께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심영호 “나를 믿어줘서 고마워요. 내내 사랑해 줘서 고마워요. 농사를 짓는 남편이 부끄러울 만도 한데, 단 한 번도 그런 내색 없이 되레 친구들과 주변인들에게 남편이 농사를 짓는다고 자랑하며, 멋있다 이야기해 줘서 고마워요. 남편으로 아버지로 그리고 근사한 아들내미로 만들어줘서 고마워요.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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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영호가 사랑하는 사람들

그와의 대화에서 나는 아쉽게도 받은 사랑에 보답하는 구체적인 방법은 알아내지 못했다. 대화하는 동안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한 사람의 믿음과 사랑이 상대를 얼마나 높은 곳까지 이끌 수 있는지를 두 손 놓고 구경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리고 그 정상은 날이 맑은 날에는 뚜렷하게 보일 정도로 낮았지만, 좀처럼 가까워질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할 뿐이었다. 누군가의 기대 없는 사랑이 얼마나 희귀한 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런 희귀를 얻은 사람이 제대로 예우를 갖추는 건 그보다 더 희귀함을 이번에 그를 통해 깨달았다.

심영호 농부가 인터뷰의 끝에서 반복한 고마워요는 비단 아내에게만 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그 고마움은 아내를 지나 자식을 믿고 농사일을 맡긴 아버지와 어머니, 함께 힘을 내주는 형님을 관통하며 다시금 그에게로 흘러간다. 그렇게 받은 사랑에 보답하고 또다시 사랑을 받는 태평하고 아름다운 과정을 그는 무한히 반복한다. 그는 고마움을 알고 보답할 줄 아는 사람이다.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받은 만큼 돌려주지 못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은 세상에서 그는 아주 좋은 쪽으로 늘 되돌려주는 사람이다.

꽃이 피기 전에 그를 알게 되어 다행이다.


※ 위 글은 농가 수익 증대를 위한 전성배 작가의 비영리적 집필 활동 중 하나로, 어떠한 대가 없이 작성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심영호 농부님의 대저 토마토가 궁금하신 독자분들께서는 아래에 있는 농부님의 블로그 주소를 방문하시면 되겠습니다. 많은 관심과 사랑 부탁드리겠습니다.

[심서방 짭짤이 토마토 농장]

https://www.심서방.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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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배田性培 : 1991년에 태어났다. [격간隔刊 전성배 산문]의 발행인이며, 농산물을 이야기하고 농부를 인터뷰한다. 농업계 이슈에 관심이 많고, 여러 주제로 글을 쓰지만 대부분 삶의 테두리 안에 머문다. 지은 책으로 <계절을 팔고 있습니다>가 있다. 계속해서 우리나라 농부에게 도움이 될 글을 쓰는 것과 더불어 문학적으로 완성도 있는 글을 쓰는 것이 목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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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애도하는 날에도 나는 허기를 느꼈다 (산문집)

우리는 오늘도 이렇게 살아가는지 죽어가는지 모를 시간으로 하루를 채우고 있습니다. 그 시간은 대체로 지난하다 아주 가끔 아름다운 것으로 우리가 죽어가는 길 위에 흩뿌려집니다. 바라는 게 있다면 이 책은 되도록 아름다운 것에 속하여 그 길 위에 놓였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