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01. 웹소설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흘러왔는가? 으로 부터 이어집니다.
이번 화의 글은 길고 복잡합니다. 복잡하게 꼬여 있는 개념들을 다루다 보니 그렇습니다. 이번 화만 이런 편이고, 다음 화부터는 좀 더 일반적인, 비즈니스적 관점의 이야기들을 다루게 될 것입니다.
1.장르문학은 대중문학일까요?
우리는 흔히 향유하는 대상에 따라 대중문학과 순수문학을 구분하곤 합니다. 그리고 대중문학의 하위 갈래에 장르문학이 있다고 생각하곤 하죠. 먼저 대중문학의 정의를 찾아보겠습니다.
대중문학은 순수문학에 비해서 비교적 이해능력이 낮은 대중의 통속적 흥미에 어필하며 또한 상업성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문학이다.
그런데 장르문학이 이런 대중문학에 속해있는 것이 맞을까요? 과거 장르문학이 대중문학으로 불린 적도 있었지만, 대중문학의 정의까지 그대로 계승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입니다. 설령 장르문학이 ‘재미’가 중요하고 ‘취미’를 기반으로 한 문학이며, 순수문학과는 다르다는 것에 동의한다고 해도 말이죠. 그럼에도 장르 콘텐츠가 때로 (요즘은 흔하게) 상업적으로 성공하는 현상 때문에, 마치 장르문학이 곧 보편 대중을 위해서 창작되는 이야기이며, 그러다보니 어려운 사유는 지양하고, 순수한 예술적 감흥을 추구한다는 소위 순수문학과는 정반대에 서 있다는 오해를 받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말 모든 장르문학에 보편적인 대중성이 있을까요? 장르성이 강한 것과, 대중성이 높은 것, 그리고 상업성이 좋은 것은 비례할까요? 리그 오브 레전드 게임대회가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수준의 상업성을 자랑하고 있는데, 과연 보편 대중적 취미일까요?
이런 질문도 해 볼 수 있죠. 장르문학에는 순수문학이 추구하는 바가 전혀 없을까요? 인간에 대한 탐구, 예술적 감흥, 지적 유희, 이런 것이 정말 없나요?
장르문학이 상업성을 고려하여 기획된 문학은 맞나요? 오랫동안 마이너 취미로 여겨지면서도 장르문학을 쓰고 탐독하던 사람들도 동의할까요?
우리가 장르문학을 뭉툭하게, 인상비평적으로 ‘상업성, 대중성’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하는 순간, 이런 질문들이 생길 수 밖에 없습니다. 장르문학은 그저 ‘특정한 규칙을 가진, 취미 기반의 문학’이기 때문입니다.
취미 기반이기 때문에, 장르 양식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즉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이 늘어날수록 대중적이 되고 상업성이 커진 것으로 보아야겠죠. 이런 속성에 대해서, 1화에서 보드게임과 비슷하다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장르 사업을 기획하실 때, 장르로 비즈니스를 하실 때, ‘많은 사람들이 좋아할 만 한 거’ ‘야하거나 잔인하거나 자극적인 거’ ‘쉬운 거’ ‘통속적인 거’, ‘그냥 문외한이 딱 봐도 재미있는 거’ 이런 거 하신다고 성공하는 게 아니란 뜻입니다.
2. 장르문학은 장르 양식을 가진 문학입니다.
모든 예술에는 특유의 양식이 있습니다. 비슷한 말로 형식, 문법 등등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예술 분야만이 가진 ‘고유한 형식적인 측면’을 양식이라고 이해하면 쉬울 것 같습니다. 이 양식들은 개인이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이것을 만들고 향유하는 사람들 간에 합의되는 것입니다.
이 합의된 형식들을 이해하지 못하면 예술을 이해하기 힘듭니다. 형식이라고 하면 내용을 담는 단순한 그릇에 불과하다고 여기는 분들이 있는데, 실은 형식이야말로 예술의 정체성을 규정짓습니다.
만화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만화 안의 그림, 글자, 컷, 말풍선 같은 형식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을 것입니다. 만약 말풍선의 모양들을 작가가 임의대로 바꾼다면, 우리는 캐릭터가 생각을 하는지, 말을 하는지, 소리를 지르는지, 아니면 나레이션인지 알 수 없게 됩니다.
이런 형식들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 예술이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온전하게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이런 형식을 잘 모르기 때문에, 내용을 이해하기 힘들어서 만화가 재미없다는 분도 계십니다.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형식을 알아야 하고, 그 형식을 익히는 단계 때문에 진입 장벽이 생기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생각해보세요. 형식 하나를 없앨 때마다 표현력과 전달력이 무뎌집니다. 합의된 규칙이 많을수록 복잡한 내용을 경제적으로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습니다. 많은 작품들, 즉 문학이면 문학, 미술이면 미술, 영화면 영화, 건축이면 건축, 사진이면 사진, 만화면 만화, 각각 그것 밖에 표현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 날카로움은 그 분야의 고유 형식, 즉 양식이 가능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시다시피 문학에도 양식이 있습니다. 문학이란 문학이 다루고자 하는 어떤 가치를 특유의 문법으로 구조화한 텍스트 양식입니다. 문학에 양식이 있다는 말은, 우리가 쉽게 읽을 수 있는 문자로 쓰여 있다고 해도 그게 일상의 자연어가 아니라는 뜻이죠. 인터넷 중고 거래 사이트에 물건을 팔기 위해 사용하는 글의 양식과, 문학에서 사용하는 글의 양식은 다릅니다. 이 양식들이 사용자 간에 합의된 문법들입니다.
장르문학의 양식은 기존에 우리가 ‘순수문학’이라고 부르던 문학과 다릅니다. 즉 순수문학과 장르문학의 차이는 단순히 소재나 주제보다는 결국 이 양식의 차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연구자들이 장르만을 위한 비평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달라진 양식의 장르문학에 웹, 모바일, 디지털 미디어라는 매체적 특성에서 비롯된 양식까지 결합한다면? 단순히 웹소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전 한국 공영방송의 드라마와 현재 OTT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드라마의 차이를 떠올려보세요. 오래 전 서울의 달, 여명의 눈동자, 토지 같은 드라마들과, 지금의 킹덤, 오징어 게임, 더 글로리 등과 비교해보세요. 또는 한국의 드라마가 한류라는 이름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을 때의 대장금이란 작품을 떠올려보세요. 글로벌 비즈니스가 시작되고 OTT라는 거대 디지털 플랫폼까지 결합할수록 장르적 성격이 더욱 명확해진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장르를 제대로 안다는 것은 비즈니스적 관점에서도 중요하지만, 현 시대를 관통하는 하나의 관점을 갖는 것이기도 합니다.
2. 개연성을 다루는 태도가 장르문학의 가장 큰 특징
그렇다면 장르문학은 우리가 순수문학이라고 불렀던 것들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학생들을 가르치다보면 이런 질문을 받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일단 ‘순수문학(순문학)’이라는 용어가 맞냐는 것부터 시작해야겠지만, 그래도 우리끼리 흔히 지시하는 ‘순문학’이란 게 있긴 있잖아요? 장르문학과 순문학에 대해서는 훌륭한 이론가들이 이미 많이 이야기했습니다. 비평이론이나 학문으로 접근하고 싶으시다면 제 이야기를 듣는 것보다 차라리 장르문학비평서 같은 걸 보는 게 더 좋을 수 있습니다. 비평가, 이론가, 학자, 그리고 현재 활동하고 있는 현직 작가님들의 책과 논문, 담론, 기고문들을 읽어보는 것이 더 도움이 됩니다.
그런데 그런 학문적인 정의 말고, 이야기를 소비하는 사람들이 왜 장르문학과 순문학을 즐기는지, 그 관점으로 설명해보고자 합니다.
먼저 주변의 현실을 봅시다. ‘현실은 시궁창’이라는 농담이 있죠.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농담이 아닙니다. 이 말의 진짜 의미는 ‘현실에는 개연성이 없다’는 말입니다.
웹소설 같은 걸 읽다보면 댓글로 스토리에 개연성이 있네 없네, 그런 이야기들 서로 하는 걸 보실 수 있으실 겁니다. 개연성이 뭘까요? 일어날 법한 것, 있음직한 걸 말할까요? 그럴싸한 느낌을 말하는 걸까요? 아무리 봐도 이 스토리는 너무 우연에 기대고 작위적인데, 작가가 ‘이건 실제 사건을 모델로 했습니다.’ 라고 말한다고 칩시다. 그럼 개연성이 있는 걸까요? 있을 법 하다는 걸 뛰어 넘어, 실제로 있었던 일이잖아요.
그런데 개연성은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럴싸하다는 말은, ‘작품에 설정한 어떤 규칙, 범위, 작품의 세계관 안에서 논리적이고 필연적으로 벌어질 법하다’는 뜻입니다. 즉 개연성은 현실성에 뿌리를 둔 것이 아니라, 세계관에 뿌리를 둡니다. 이 세계관이란 개념이 바로 장르가 개연성을 다루는 방식의 총체입니다. 세계관은 판타지나 SF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눈에 명확하게 보이는 시공간이 없어도, 또는 시대, 환경, 기후, 건축, 옷차림 설정이 없어도, 사회 규범, 사람들의 가치관, 말투, 플롯의 흐름, 사건의 진행 등, 이 작품의 모든 것과 원자 단위로 연결된 하나의 시스템으로서 세계관은 존재합니다. 지구 안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같은 물리 법칙 안에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모든 사건과 캐릭터와 환경이 큰 틀 안에서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 사건과 사건끼리는 필연적인 원인과 결과로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이 개연성입니다. 보드 게임에서 룰북에서 제시하는 규칙대로 주사위를 던지고 말을 움직이며, 게임판 위에 그려진 길을 따라서 말을 옮겨야만 공정한 게임을 할 수 있죠. 그 합의가 개연성입니다.
장르는 이런 방식으로 게임판(세계 디자인)과 게임룰(장르 규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장르가 이런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장르문학은 한 번 게임이 개발되면 이를 계속 리메이크를 하며 창작자와 독자들이 가지고 놀 수 있습니다. 같은 종류의 게임을 규칙을 조금씩 바꿔가며 다시 플레이하고, 다시 플레이합니다.
즉 이 모든 것을 담은 규칙과 관습의 총체인 세계관이 독자들에게 한 번 승인되면, 이제 그것은 두 번 세 번 설명을 반복할 필요가 없는 안정적인 도구가 된다는 뜻입니다. 동서남북 남제북개의 세계관이 한 번 승인되면 무협 장르는 그걸 계속 사용해도 됩니다. 엘프와 호빗이라는 종족이 있는 세계관이 한 번 승인되면 판타지 장르는 그걸 계속 사용해도 됩니다. 우린 그걸 장르 컨벤션, 또는 장르 관습이라고도 부릅니다.
웹소설에 흔한 설정인, 주인공이 죽었더니 과거로 회귀하여, 다른 사람의 몸에 빙의하는 방식으로 환생하는 이야기에는 이젠 아무도 의문을 품지 않습니다. 그것이 승인된 세계관과 장르 관습의 힘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야기 속의 모든 것이 하나의 규칙으로 연결되어 있어야 ‘개연성’을 느끼는 걸까요?
우리 인류가 원래 이 모양입니다. 우리 인류는 모든 사건을 원인과 결과로 유기적으로 연결된 하나의 필연적인 흐름으로 생각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이게 우리가 가진 ‘스토리를 만드는 능력’입니다.
우리 인류가 왜 이렇게 스토리에 사족을 못 쓰는지, 왜 뭔가를 외우려고 해도 스토리를 만들어야 더 잘 외워지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설명이 있지만, 결론은 어쨌거나 하나입니다. 잘 조직되어 잘 시뮬레이션 된 스토리에는 인류는 대책없이 매혹된다는 것입니다.
이 능력 때문에 우리는 선택에 대한 불안도 더 크게 느낍니다. 나의 선택이 나쁜 분기로 꺾어지면 어쩌지? 란 생각 때문이죠. 만약 과거로 돌아가서 다른 선택을 했다면? 이런 식의 망상도 할 수 있는 거고요. 어쩌면 웹소설에 유난히 회귀, 환생, 빙의 설정이 많은 이유는 이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특정한 선택을 하는 순간 바로 그 분기점부터 전혀 다른 사건들이 한 줄의 선처럼 펼쳐질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모든 사건은 도미노처럼 앞 사건이 뒷 사건의 원인이 되고, 뒷 사건이 앞 사건의 결과가 되어 흘러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건은 서로 유일한 원인과 결과가 되어 하나의 선으로 흘러가죠. 이것이 인류가 가진 개연성이란 감각의 핵심입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특정 세계관 속에서 개연성을 시뮬레이션 하는 것이 바로 장르를 가지고 노는 방법이란 것입니다.
이것이 장르물을 창작할 때는 ‘설정’이란 단어를 많이 쓰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세계관 설정, 캐릭터 설정 등등이요. 이런 부분이 순문학과는 다르죠. 이 ‘설정하기’가 세계관의 규칙을 조직하는 행위입니다. 하나의 설정에 어떠한 개연성들이 생기는지를 시뮬레이션하고 그 사고 실험을 통해 이야기를 씁니다.
첨언하자면, 장르물이 이런 성격을 가지고 있다보니 장르물에 빠지는 분들 중에는 ‘규칙 시뮬레이션 하기’, 즉 설정 놀이 그 자체에 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줄창 세계관만 정교하게 짜는 것, 캐릭터만 정교하게 짜는 것만으로는 이야기가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장르물 쓰기에 도전하기 전, 자신이 장르물을 좋아하는 이유가 규칙 자체에 매혹되는 것인지, 규칙을 가진 사건-이야기를 좋아하는 것인지 돌이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비즈니스를 하시는 분도 기억해 두실 필요가 있습니다. 어마어마하게 상상력이 풍부해 보이는 작업물들을 가지고 오는 예비 작가님들이 종종 나타날 것입니다. 아무리 대단하고 기상천외한 상상력이 들어있더라도, 그 안에는 설정만 있는지 아니면 뚜렷한 사건과 플롯이 있는지를 알아보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게임판을 잘 디자인하고, 룰북만 잘 만드는 기획자가 아니라, 그걸로 게임을 해서 드라마틱한 플레이와 승패의 결과를 보여주는 작가를 픽업하셔야 합니다.
이렇듯 개연성을 다루는 태도, 관습을 쓰는 방식이 장르문학과 순문학을 구분하는 가장 큰 차이이며, 사람들이 장르문학에서 기대하는 바는 바로 그것입니다.
‘내가 이미 아는 맛인데 다른 집보다 더 맛집일 것.’
물론 이런 생각을 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장르가 그런 보드게임 같은 거라면, 적당히 글을 쓸 줄 아는 초보 작가들을 데려다 세계관과 장르 관습 가르쳐서 기획을 주고 조립하듯 찍어내게 하면 되겠네?’ 물론 됩니다. 기획을 아주 잘 한다면 그렇게 양산된 작품들이 중간은 갈 것입니다. 하지만 ‘아는 맛인데 좀 더 맛집’을 만드는 마지막 계단은 결국 훈련된 작가가 자신의 내면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와 잘 하는 이야기를 끌어내어, 이야기를 짓고 빚어내는 힘을 통해 오를 수 있다는 것도 아셔야 합니다. 단순히 MSG 좀 친다고 평범한 이야기가 상위 10%의 수준으로 재미있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꾸준히 중상위권을 유지하는 기성 작가들의 힘을 믿으세요.
3. 현실이 시궁창이기 때문에 장르문학은 아름답다
잠깐 현실을 한 번 보겠습니다.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아무런 개연성이 없습니다. 정말로 말 그대로 시궁창이에요. 아무 일이나 벌어집니다.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일이 그냥 벌어질 뿐인데, 이것에 대한 납득될 만한 이유 같은 게 전혀 없습니다. 원인 없이 해프닝만 있는 겁니다. 현실성은 개연성은 관계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만수를 누리고 행복하게 살다가 죽었다고 칩시다. 그 사람이 착해서일까요? 오는 길에 누가 던진 쓰레기에 맞았어요. 그게 여러분이 나쁜 생각을 해서 벌을 받은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렇게 작은 일들조차도 무심코 이유를 찾는 게 사람인데, 개인적으로 너무 큰 고통, 국가적으로 너무 큰 재난, 아니면 너무 불공평한 일이 벌어지면요, 우리는 간절하게 이유를 찾게 됩니다.
즉 ‘스토리적으로 말이 되는 걸’ 찾아내려고 합니다. 그래야 설명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원래 복도 없고 재수가 없는 사람이라서 이런 일이 생겼나? 라며 무속적으로 사고하기도 하고요. 저렇게 큰 사고가 이유없이 날 리가 없어. 저건 분명히 무슨 음모가 있어. 쌍동이 빌딩이 왜 무너지지? 정치인이 권력 장악을 위해서 무너뜨린 건가? 이렇게 음모론적으로 사고하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무속에 빠지고 여전히 음모론이 판치는 이유는, 많은 부조리한 일들이 그냥 생긴다는 것이 말이 안 되거든요. 도저히 납득이 안 되거든요. 그러니 ‘저 나라는 하나님을 안 믿는 타락한 나라라서 그렇습니다.’라고 누가 그러면 또 ‘아 그래서 그렇구나!’ 하는 분들도 있잖아요. 인간은 개연성 없는 현실 앞에서 얼마나 무력하고 속기 쉬운가요?
현실은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아무 이유도 없이 그냥 벌어집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현실에 개연성 같은 건 없습니다. 우린 지뢰와 선물이 깔려 있는 벌판을, 마치 규칙이 있는 농장이라고 착각하고 배회하는 한 무리의 개떼 같습니다. 누구도 이 현실을 통제할 수 없어요. 어디에 지뢰가 있는지 선물이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현실에는 세계관이라는 게 없기 때문입니다. 누가 설정해 준 세계관, 그런 게 있으면 얼마나 알기 쉬울까요? 지뢰와 선물이 묻힌 규칙, 그런 의도를 가진 규칙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신이 어떤 의지로 세계관을 설정했다면 그에 따라 살면 지뢰도 피하고 선물을 받겠죠. 착하게 살면 선물을 파낼 수 있고, 마음 씀씀이가 나쁘면 지뢰를 밟도록 인도되겠죠.
우리 인류는 원인과 결과가 있어야 납득을 하니까, 이 시궁창 같은 세계에 이유가 있을 거라고, 신이 어떤 설정을 했을 거라고 믿고, 뭔가 시궁창 같은 일이 벌어지면 신의 뜻을 알아내려고 아우성을 쳤단 말입니다. 출제 의도를 알아내려고요. 하지만 세계관이 없어요. 출제 의도가 없어요. 심지어 출제자도 없는 것 같아요. 설령 신이 있다고 가정해도, 인간의 눈으로 볼 때는 현실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에 일일이 다 의도가 깔린 것 같지가 않아요. 이런 느낌이 바로 현실이죠.
사람들이 왜 장르문학을 좋아하는지에 대한 답은 여기에 있습니다. 장르문학은 룰이 있습니다. 작가가 규칙을, 범주를, 범위를, 한계를, 즉 세계관을 설정했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지뢰처럼 이유없이 터지지 않고 도미노처럼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도미노가 쓰러진 이유는, 첫 번째 도미노가 쓰러졌기 때문입니다. 1막에 권총이 나오면 3막에는 발사되기 때문입니다.
장르 작법은 그 도미노가 얼마나 아름답고 말끔하게 보는 사람을 몰입시키며 쓰러지는지를 설계하는 겁니다. 드디어 마지막 도미노가 넘어갈 때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만드는 겁니다. 중간에 몇 번이나 위험했지만, 결국 마지막 도미노가 넘어갈 건 알고 있는 겁니다.
권선징악의 세계관에서는 착한 사람이 결국 해피엔딩을 맞이하죠. 중세적 세계관에서는 신앙심 깊은 기사들이 낭만적인 사랑을 위해 목숨을 바칩니다. 어려운 연인들은 방해를 뛰어넘습니다. 영웅은 관문을 통과하고 세상을 구하죠. 젊고 가난해도 능력이 있으면 성공하고요. 치사한 빌런은 정당하게 노력한 주인공에게 결국은 무릎을 꿇습니다. 금기라고 설정된 룰을 어기면 호러적 처벌을 받고요. 협이 있는 무도가가 무림을 바로잡고, 탐정은 미스터리를 해결하죠. 복수물은 복수에 성공합니다.
장르문학은, 이 불확실한 세계, 실존밖에 없는 세계 속에서 불안에 빠진 우리를 위로하는 아름다운 설계입니다. 이야기와 캐릭터가 있는 명확한 디자인이고 견고한 아키텍처입니다.
장르문학의 클리셰가 유치하다는 말이 있죠? 그까짓 클리셰 좀 따르는 게 왜 문제일까요? 장르마다 내용이 다 비슷비슷한 거? 그 비슷비슷한 관습이 우리를 안도시키는 겁니다. 복수 장르 앞에서 용서의 의의나 사적구제는 금지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얼마나 허무합니까? 여성 킬러물 앞에서 여성의 근력 이야기를 하는 것은 또 얼마나 허무합니까?
반면 순문학은 시궁창 같은 현실, 그것 자체를 보여주곤 합니다. 현실을 뚝 잘라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단면을 우리 눈 앞에 들이밀면서, 똑바로 보라고, 이 불편함을 외면하지 말라고, 바로 이게 현실이라고, 그러기 위해서 불편함을 일부러 유발합니다. 현실이 너무 어이가 없으니 현실의 부조리함을 쓴 것만으로도 환상과 리얼리티의 경계에 있는 “마술적” 사실주의가 되기도 하죠.
순문학은 그렇습니다. 현실을 고치고 싶으면 제대로 알아야하지 않겠느냐고 묻기도 하고, 도발적으로 내 멱살을 잡기도 하죠. 나를 탓하기도 하고, 나에게 애걸하기도 하고, 나를 비웃기도 합니다. 우리의 기대를 무너뜨려 충격 속에서 새로운 사유에 눈을 뜨게 하기도 하고, 인문학적 담론을 확장하기 위해서 쓰여질 때도 있죠.
그 뿐인가요? 이런 시궁창 현실에 진짜 현실적인 인간을 던져놓고 관찰하기도 합니다. 개연성 없는, 예측 안되고 일관성 없는 진짜 우리 같이 별 거 아닌 위선적이고 누추한 인간들을 던져놓는 거죠. 그리고는 인간의 약한 점과 악한 점과 장한 점과 애잔한 점을 관찰합니다. 이해가 되기도 하고 되지도 않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밉기도 하고, 답답하고 짜증나기도 하고요. 그런 인간의 레이어를 다 벗겨내며 관찰합니다. 인간의 아름다움을 찾기도 하고, 강인함을 찾기도 하고, 더러움을 찾기도 해요. 내 현실도 복잡해 죽겠는데, 이걸 보면 더 복잡해지곤 합니다.
그런데 그 안에서 내가 외면했던 불편함을 다시금 직시하는 계기가 되고, 분노와 슬픔, 구차한 사랑과 연민, 구역질을 느끼며 선도 악도 없는 어리석은 인간이 뭔지 깨닫고, 내가 한낱 인간이란 것도 깨닫고, 그리고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기도 하죠.
그래서 재미보다는 괴로울 때가 많습니다. 게임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 2를 플레이하셨다면 여러분은 이런 괴로움을 이미 느껴보신 겁니다. 이 게임은 장르물이 순문학적 기능을 한 것으로 보아도 좋고요, 그 반대로 순문학이 장르의 규칙을 차용한 것이라고 대범하게 해석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장르의 개연성을 파괴하고 장르의 규칙을 파괴하고 세계관에 의문을 심는 방식으로 전개되어, 까뮈의 이방인을 마치 게임으로 하는 듯한 고통을 주었죠.
라스트 오브 어스 2의 어마어마한 비난과 증오, 분노와 실망은 우리가 장르물에서 기대하던 흐름이 아니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그래서 나쁜 시도냐고 묻는다면 저는 아니라고 대답하겠지만, 이런 시도는 명확한 의도를 통해 이루어지긴 해야 한다는 좋은 사례입니다. 이렇게 욕먹을 줄 몰랐다면 장르 콘텐츠로 비즈니스를 하기 어려운 거죠.
장르문학과 순문학의 차이는 연구자마다 다르게 이야기하겠지만, 저는 이처럼 ‘개연성을 다루는 태도의 차이’로 설명하곤 합니다. 장르문학이 아름다운 이유도 사람마다 다 다르게 이야기하겠지만, 저는 실존적 불안에서 우리를 위로하는, 명쾌한 건축적 설계가 주는 아름다움을 빼놓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이것이 사람들이 (웹소설을 포함한) 장르문학을 사랑하는 이유, 순문학도 계속 읽는 이유입니다.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 2처럼, 어떤 특정한 조건이라면 서로 교차하거나 둘 다 추구할 수 있다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되실 거예요. 물론 서로의 목적이 다르다보니 평소엔 서로의 거리를 지키려는 이유도 짐작이 되실 겁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장르문학, 웹소설, 장르 콘텐츠를 다루실 때 어떤 관점을 가지면 좋을지 감이 오실 것입니다. ‘나는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장르문학(웹소설)을 쓸 거야!’ ‘나는 지금까지 없던 웹소설을 발굴해서 유통할 거야!’ ‘나는 반지의 제왕 같은 장르문학을 발굴해서 해외 시장에서 우뚝 설 거야!’ 같은 이야기는 그래서 아마추어적입니다. 특히 마지막 선언에 대해서 전문가들은 이렇게 생각할 겁니다. ‘뭐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설정 놀음과 진짜 이야기를 구분하지 못하는 지망생들이 보통 저렇게 말하더라.’ 라고요. (물론 아주 드문 확률로 진짜가 있을 수도 있겠죠.)
‘지금까지 나온 장르의 관습을 잘 학습해서, 그것보다 더 개선된 걸 만들겠다. 그리고 거기에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와 나만의 장점을 담겠다.’ 이것이 프로의 관점입니다.
4. 제도로서의 순문학
이왕 여기까지 온 김에 순문학 이야기도 해봅시다. 흔히 대중문학과 구분하기 위해 순문학이란 용어를 사용하는데요, 저는 대중문학과 목적을 구분할 필요가 있을 땐 제도문학, 문단문학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제도문학, 학계와 대학을 묶은 어떤 ‘예술제도’에서 승인하는 문학인 거죠. 그렇다면 제도에서는 어떤 문학을 취급해오려고 한 것일까요? 이 제도의 바탕은 인문과학입니다. 인문과학, 즉 humanities는 단어 그대로, 인간에 대한 학문입니다. 인간의 사상과 예술과 문화에 관해 탐구하고, 인간과 세계가 맞닿는 지점을 탐구합니다.
예를 들자면, 인간과 인생에 대해 탐구하는 문학, 예술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표방하는 문학, 아니면 사회 참여 문학 등을 연구하려고 할 것입니다. 또는 시공간을 뛰어넘어 보편성과 항구성을 가져 고전이 되려고 하는 문학을 창작하려고 할 것입니다.
이런 것이 흔히 말하는 순문학입니다.
그런데 모든 제도는 스스로를 유지 존속시키기 위한 편입 과정이 필수죠. 당연히 순문학에도 편입 과정, 즉 ‘데뷔’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제도적 승인입니다. 문학계에서는 이 승인 역할을 주로 담당해 온 것이 등단 시스템입니다. 그래서 순문학을 문단 문학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제도의 승인이 제도에 속한 것과 아닌 것을 가릅니다. 뒤샹이 가게에서 사온 남자 소변기를 갤러리에 출품했을 때, 예술 제도가 그것을 승인했기 때문에 ‘샘’이라는 현대미술 작품이 될 수 있었던 것과 같죠. 승인받지 못한 다른 소변기들은 여전히 상품일 뿐입니다. 세상의 어떤 제도라도 승인 절차는 반드시 필요하므로, 승인 절차 그 자체는 나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승인 절차를 누가 하고 있으며 어떤 기준으로 하고 있는가, 그 권위를 어떤 식으로 사용하느냐에 따라 때로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따라서 장르문학이 순문학이 될 수 있는지 아닌지를 묻는 건 좋은 질문이 아닙니다. 장르문학의 가치를 순문학적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도 의미없는 일입니다. 그저 순문학은 제도 내에서 읽어낼 수 있을 법한 모든 종류의 작품을 승인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는 장르문학에 대해 우위를 점하려는 행동도 아니고, 장르문학이 잘 나가니 숟가락을 얹으려는 행동도 아닙니다.
한편 장르문학은 이 규칙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것이므로, 다른 규칙을 가진 제도의 승인이 크게 의미없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구태여 그 제도 자체를 부정하며 굳이 거리를 벌리려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장르문학 중에 기존의 제도 문학의 기준에 부합되는 것이 있으면 승인될 수도 있고, 또는 제도 자체의 외연이 넓어진다면 어떤 장르 작품들은 저절로 포함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장르문학이나 순문학이 서로 간에 더 발전하려면, 순문학의 제도가 무능해지기보다는 차라리 바른 권위가 있는 편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나아가 이런 질문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등단 시스템이 장르문학을 유독 박하게 평가하고 있는가? 얕잡아 보았는가? 승인되고도 남을 작품들이 장르문학 관습을 가졌다는 이유로 불공평한 대우를 받고 있는가? 그런 경향이 없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순문학이 가진 제도는 그간 장르문학을 잘 몰랐고, 편견을 가져온 건 사실인 것 같습니다. 등단 시스템만으로는 장르문학을 공평하게 봐주지도, 비평하지도 못했던 것도 같습니다.
그러면 순문학 제도는 앞으로 장르문학을 의도적으로 차별할 작정인가? 그것은 아닐 거라 믿습니다. 그간 장르문학이 차별을 받았다면 제도 그 자체가 존재해서라기보다, 승인 절차의 문제, 또는 적합한 장르 비평의 툴이 없어서라고 보는 편이 옳을 것 같습니다. 순문학 제도에서도 장르문학의 인문학적 가치를 제대로 발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순문학이 장르문학의 우위에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인문학적인 가치를 가진 장르 작품들을 만날 기회를 순문학계에서 놓치지 않기 위해서라고 보는 편이 맞을 것입니다.
5.끝으로
이번 화는 사업 좀 하자는데 ‘이런 것까지 알아야 하나?’ 싶은 내용들이 많으셨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업도 결국 장르물 같은 것이 아닐까요? 장르에 대한 관습을 잘 알수록 자유자재로 가지고 놀 수 있고, 적당한 선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확장할 수 있는 것처럼요.
아이템에 대한 이해도가 마지막 한 끝의 차이를 만듭니다. 제가 오늘 쓴 것이 모두 맞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저의 관점에서 새롭게 분석한 글이므로 동의하지 않는 작가님들, 전문가들도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자기 분석과 자기 통찰이 생길 때까지 계속 습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만화는 연필로 그린 뒤 펜선을 따고 나면 여기저기 삐뚤 빼뚤 튀어나온 연필 선은 지우면서 제작했습니다. 이 글이 장르 비즈니스의 첫 연필선이 되어, 후에 훨씬 더 훌륭한 분석, 비평, 통찰을 습득하신 뒤, ‘역시 처음 읽었던 그 견해는 좀 거칠고 부족했어’ 하며 폐기되는 용도로 쓰인다면 아주 보람찰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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