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탈길을 돌아 길게 이어지는 산복도로는 부산의 역사다. 산복도로는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친 피란민들의 애환과 고단한 삶의 흔적을 담고 있다.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이야기가 곳곳에 넘쳐난다. 굽이굽이 하늘에 닿을 듯 가파른 비탈길과 산동네의 빼곡한 지붕들은 우리네 삶을 속삭인다. 이야기 보따리는 ‘이바구길’이 되어 산복도로의 현대판 르네상스를 이뤄내고 있다. 부산 최초 산복도로인 초량 이바구길, 오랜 세월의 흔적을 따라 시간여행을…
‘이바구’는 부산 사투리로 ‘이야기’라는 뜻이다. 시대의 아픔을 피할 수 없었던 피란민들에게 이바구길은 삶의 터전이자 세상과 소통하는 길이었다. 초량 이바구길은 비탈진 언덕배기 골목마다 우리 아버지 세대가 살아온 따뜻한 이야기를 품고 있다. 부산역 앞에서 초량 이바구길을 향해 뚜벅이 여행을 시작한다. 산동네 이야기를 따라 걷다 보면, 부산의 색다른 매력을 느끼게 될 것이다.
굴곡진 역사를 담은 부산의 진정한 속살 이야기
초량 이바구길은 부산의 명물인 차이나타운 끝자락에 있는 옛 백제병원에서 시작해, 남선창고 터와 168계단, 김민부 전망대, 이바구 공작소를 지나 유치환 우체통과 까꼬막까지 약 2km에 걸쳐 이어져 있다.
첫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은 옛 백제병원이다. 초량 이바구길에는 ‘최초’라는 타이틀이 붙는 근대 문화유산이 몇 개 있다. 그중 하나인 ‘백제병원’은 1922년에 지어진 부산의 최초 개인종합병원으로 붉은 벽돌로 5층까지 탄탄하게 쌓아 올린 독특한 건축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세련된 외관은 여행자들의 눈길을 끌어당긴다. 내부도 색다르다. 낡은 층계와 속이 훤히 드러나는 벽면은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한때 서양 의료진까지 갖춰 성업하는 병원이었으나, 악성 루머와 경영난이 겹쳐 관리권이 중국인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이후 중국집, 예식장 등 여러 차례 용도로 변경했지만, 설립 당시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2014년에는 대한민국 등록문화재 제 645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는 카페로 운영되어 부산시민과 여행객들의 문화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백제병원 바로 뒤편에는 1900년에 세워진 부산 최초의 근대식 물류창고인 ‘남선창고 터’가 있다. 전국의 특산물을 배로 부산항까지 운송해 와서 경부선을 통해 각 지방으로 보내기 전에 보관하던 곳이었다.
함경도 명태가 가장 많이 보관되어 있어 명태고방으로 불리기로 했던 이곳은 ‘부산 토박이치고 남선창고 명태 눈알 안 빼먹은 사람 없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부산 수산물 거래의 중심이었다. 당시 남선창고 상인들은 창고를 경영하면서 1907년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했으며, 1920년대에 조선인 학교를 짓는 등 교육과 문화 사업을 후원하였다.
이렇게 역사적 의미가 깊은 건물이었지만, 안타깝게도 2009년 4월 소유주에 의해 철거되었다. 현재는 붉은 벽돌로 쌓은 한쪽 담벼락만 남아있고, 남선창고 자리에는 대형마트가 들어서 있다. 천 평이 넘던 창고의 위용은 사라지고 없다. 남선창고의 흔적은 일부러 찾아야 겨우 볼 수 있는 너비 15m 정도의 담장이 다다. 마치 역사 책의 찢어진 한 페이지를 마주한 느낌을 준다.
의미있는 건축물을 둘러본 뒤 이바구길 이정표를 따라 천천히 걷다 보면 담장 갤러리를 만난다. 담벼락에 옛 초량동의 정경 사진과 동구 출신 유명 작가들의 문학 작품들이 함께 전시된 공간으로 산복도로의 추억을 들려준다.
담장 갤러리를 지나면 연출가 이윤택, 가수 나훈아, 개그맨 이경규 등을 배출한 명물 초량 초등학교가 나온다. 맞은편에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초량교회가 있다. 초량교회는 1893년 호주의 선교사 애덤슨에 의해 세워진 부산 최초의 교회다. 100년이 훨씬 넘는 이 교회는 일제강점기 때 신사참배 반대 운동의 진원지였다. 또한 독립운동가들의 항일민족운동과도 관련이 깊어, 한때 3·1 교회로도 불렸다. 예스러운 벽돌식 교회의 외관과 건물의 규모는 위풍당당한 초량교회의 오랜 역사를 나타낸다.
모진 세파를 이겨낸 눈물의 168계단
담벼락을 따라 조금만 올라가다 보면 초량 이바구길의 상징이자 하이라이트 명소인 ‘168 계단’을 만난다. 168계단은 산복도로에서 부산항까지 가장 빨리 내려갈 수 있는 지름길로, 까마득한 급경사의 계단 수가 168개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에는 한국전쟁 피란민들의 애환이 뿌리 깊이 서려있다. 부산항에 배가 들어오면 선착순으로 부두 일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무거운 지게를 지고 168계단을 부리나케 뛰어 내려가야 했다. 올해 5월부터 모노레일이 가동되고 있다. 주민과 여행객들을 배려하기 위한 것도 있지만, 계단을 보존하기 위한 목적도 크다.
밑에서부터 37번째 계단을 오른 후 샛길 골목길을 따라 들어가면 시원한 부산항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김민부 전망대’가 나온다. 김민부는 ‘일출봉에 해 뜨거든 날 불러주오’라고 시작하는 가곡 ‘기다리는 마음’의 작사가이자 시인이다. 부산 동구 출신인 그를 기리는 이 전망대에서는 바다가 닿아있는 산동네의 정겨운 모습과 탁 트인 부산 앞바다를 감상할 수 있다. 168계단을 힘차게 올라와 가파른 언덕 끝에 닿으면, 산복도로 사람들의 이야기를 수집해 전시하는 이바구 공작소에 도착한다. 이곳에서는 산복도로에서 살아온 부산 사람들의 역사를 모아 2개월마다 새로운 전시를 열고 있다.
산복도로의 정점인 망양로를 따라 시원한 가로수 길을 10분 정도 걷다 보면, 청마 유치환을 기리는 ‘유치환 우체통’ 전망대를 만난다. 유치환은 동구에서 터를 잡아 살다가 생을 마감한 시인으로, 유치환우체통 전망대는 그의 예술과 문학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설치됐다.
이곳에서 편지를 부치면 1년 뒤에 주소지로 배달 해준다. 마음담은 편지 한 통 띄워보는 것도 잊지 못할 여행을 만드는 방법 중 하나다. 부산항대교를 배경으로 빨간 우체통과 청마의 동상, 그의 대표시인 ‘행복’조형물이 나란히 서있다. 영도부터 부산역, 부산항 대교 전체를 한 눈에 담을 수 있다. 반이 되면 더 환상적인 전망을 감상할 수 있다.
꼬불꼬불한 가파른 초량 이바구길을 천천히 걷다 보면 격동의 세월을 살아왔던 열정적인 부산사람들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한국전쟁 등 끊임없이 겪어야 했던 모진 세파에서도 골목골목 빼곡하게 자리한 삶의 터전처럼 함께 의지하며 거칠게 살와왔을 그들의 세월이 짙게 물들어 있다. 부산의 진정한 속살을 느낄 수 있는 이곳, 초량 이바구길로 이번 주말 떠나보는 건 어떨까.
가는길 : 지하철 부산역 5번과 7번 출구 중간 지점에서 시작. 옛 백제병원부터 까꼬막까지 9개 주요 명소를 모두 방문할 경우 약 2시간 소요. ‘부산 원도심 스토리 투어’를 이용하면 ‘이야기 할매·할배’와 함께 알찬 걷기 여행을 할 수 있다. 무료. 부산 관광공사 홈페이지(http://www.bto.or.kr)에서 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