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추억 되물림

“사회적 거리 두기 2단계 격상으로 2020.8.16.(일) 0시부터 집합 금지명령 발동. 협조 바랍니다”

국립국악원

며칠 사이로 코로나19 확진자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서울·경기 지역은 ‘사회적 거리 두기’ 2단계가 내려졌다.

우리 회사도 예외 없이 재택근무로 전환됐고, 오늘 점심 약속은 취소했다.

오전 시간은 금세 지나갔다. 평일에 온 가족이 모여 함께 점심을 하는 것이 참 오랜만이다.

“오늘 점심 뭐 먹을까?”

“난 당신이 해주는 김밥이 먹고 싶네! 집에 남아 있는 명란젓이 좀 있긴 한데 이걸 넣어 만들어 줄 수 있어?”

이미 아내는 김밥 재료까지 지난 주말에 다 구매해놓았다며 흐뭇한 듯 미소를 짓는다. 아내가 내게 무엇을 해달라고 하는 건 좋은 징조다. 아내에게 내가 신뢰를 얻고 있다는 말이니 말이다. 이럴 땐 망설이면 안 된다. 바로 ‘콜’을 외쳐야 한다.

“그래 만들어볼게!”

우리 가족은 내가 만든 김밥을 좋아한다. 한 달에 한두 번은 김밥을 만들곤 한다. 아침에 10줄 정도를 싸놓으면 그날 하루는 김밥 파티(?)로 하루 먹을거리 고민은 사라진다. 그날 하루만큼은 가족 모두가 ‘이번엔 뭘 먹지’란 걱정에서 해방된다.

처음에는 마트에서 파는 ‘저렴하고 가성비 좋다’며 매대에 큼직하게 적힌 김밥 세트를 구매했지만, 요즘에는 좀 더 영양가 있고 맛있는 고품격 김밥에 도전하면서 모든 재료를 직접 고르고 있다.

내가 만드는 김밥의 종류는 다양하다. 기본으로 들어가는 건 ‘단무지, 계란, 당근, 햄(스팸)’이고, 여기에 ‘우엉’, ‘어묵’과 함께 김밥의 특징을 좌우하는 재료가 추가된다. 그동안 만든 특징적인 김밥 재료로는 ‘시금치, ‘부추’, ‘볶음김치’, ‘참치마요네즈’, ‘치즈’, ‘깻잎’ 등이 있다.

김밥이 좋은 건, 기본 재료가 충실하면 추가되는 재료가 무엇이 들어가든 맛있어서다.

기본 재료를 고를 때 팁을 하나 말하자면, 햄이나 스팸을 고를 때 뒤에 성분 표시를 확인해 구매하면 좋다. 포장지 뒷면 성분 표시를 보면 주된 고기 성분과 함량이 자세히 적혀 있어 그것을 참고로 해서 비슷한 가격대에서 함량이 가장 높은 것을 사면 된다.

김밥용 김도 중요하다. 어떤 김밥용 김으로 샀느냐에 따라 맛 차이도 크다. 다양한 김밥용 김을 사서 맛 비교를 해봤는데, 확실히 맛의 차이가 느껴졌다. 가격이 비싸다고 김밥용 김이 더 좋으리라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비싸다고 좋은 것도 아니요 싸다고 나쁜 것도 아니다. 제품의 가격을 결정하는 요인 중 하나는 마케팅비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오늘은 햄 대신에
스팸을 넣을 것이다

아들이 스팸의 짭조름함을 너무 원해서다.

김밥에 들어갈 재료를 확인한다. 스팸, 당근, 단무지, 최근에 샌드위치를 만들고 남은 로메인 상추, 아들이 좋아해 반찬용으로 샀던 명란젓이 준비됐다.

먼저 김밥용 밥을 준비한다. 갓 만든 밥을 큰 볼에 떠 놓고 참기름을 둘러 충분히 섞어주며 식혀준다. 너무 식히면 딱딱하게 굳으니 손으로 만졌을 때 따뜻함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가 좋다.

밥을 식히는 동안, 다른 재료 준비에 들어간다. 당근은 얇고 길게 썬다. 너무 크면 아들이 싫어해 맛이 도드라지지 않도록 하는 게 포인트다.

이제 스팸은 끓는 물에 데치고 김밥에 들어갈 적당한 크기로 자른다.

스팸을 물에 넣고 데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스팸이 쌀밥과 먹으면 식욕을 돋우는 밥도둑이지만, 다른 재료와 조화로움을 추구하는 김밥에는 자칫 ‘독불장군’이 될 수 있다. 자기만의 맛이 너무 강해 조화로움을 해칠 수 있어 끓는 물에 넣어 힘을 좀 빼줘야 한다.

사실 스팸이 독불장군인 데에는
태생의 비밀이 있다

스팸이 지닌 한계일 수 있다.

스팸은 우리가 기대와는 달리 순 살코기로 만들어진 햄이 아니다. 돼지고기와 함께 돼지 지방을 듬뿍 넣어 갈아 만든 혼합체다. 처음에 스팸을 만들게 된 계기가 ‘버리기 아까운 지방 부위를 활용하기 위해서’라는 설이 있다.
실제로 스팸 뒷면에 적힌 원재료 표시를 보면 나트륨과 지방의 함량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다.

여기에 한 가지 더… 스팸 뒷면에 표시된 돼지고기 함량에 비밀이 있었다. 국내 식품위생법상 육류 가공품의 경우 일정 함량의 돼지 지방을 사용했더라도 ‘기준 함량 이하’라면 원재료에 돼지고기로 표기가 가능하다고 한다. 예를 들어, 살코기는 60% 이하이고, 나머지 30%를 돼지기름으로 사용했더라도 돼지고기 90%로 표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스팸의 핑크빛, 부드러운 식감에 속으면 안 된다. 이는 지방 덕택에 가능한 것이다. 스팸의 지방 함량이 단백질 함량의 약 두 배 정도 된다……

여기에 또 하나, 스팸이 짠 이유는, 아니 짜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 지방의 보존 기간을 늘리기 위해서다.

부드러운 식감과 여기에 더해진 짭조름한 맛 덕택에 스팸은 밥도둑이란 애칭으로 대중의 인기를 얻으며 쌀밥과의 케미를 과시하고 있지만 이것은 절묘한 마케팅의 결과일 수 있다.

마치
미국식 조식(아메리칸 블랙퍼스트)처럼

미국식 조식인 ‘아메리칸 블랙퍼스트(American Breakfast)’는 마케터이자 PR 대가로 꼽히는 미국인 에드워드 버네이스(1891~1995)의 대표작 중 하나다.

20세기 초만 해도 베이컨은 미국인들에게조차 낯선 음식이었다. 이에 미국의 한 대형 베이컨 회사는 베이컨 시장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버네이스에게 홍보를 의뢰했고, 그는 ‘미국인들의 아침 식사 유형을 바꿔 베이컨 시장점유율을 높이겠다’는 전략을 세웠다.

버네이스는 광고를 쏟아붓는 대신 다른 방법을 택했다. 바로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기로 한 것이다.

이후 미국에서는 하루 중 아침 식사가 중요하다는 주장을 펼치는 의사들과 베이컨의 단백질이 인체에 도움이 된다고 말하는 의사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이는 급속도로 퍼져나가며 미국인의 아침 식단을 바꿔놓았다.

버네이스는 아침을 든든히 먹는 것이 중요하다는 인식을 만들고, 그 안에 ‘베이컨’을 교묘하게 엮어 넣었다. 그 결과 베이컨의 소비량은 급증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바로 ‘미국식 조식, 아메리칸 블랙퍼스트’다. 지금은 어딜 가도 흔히 볼 수 있고, 여행의 필수템이 된 아메리칸 블랙퍼스트의 탄생 배경에는 이러한 마케팅 전략이 숨어 있다.

난 요리하는 것을 좋아한다

나만의 방식의 요리법을 찾아가는 과정도 즐긴다. 내가 좋아하는 맛, 아내가 좋아하는 맛, 아들이 좋아하는 맛.

하지만 원칙은 있다. 좀 더 건강한 음식을 가족에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랄까. 되도록 조미료를 안 쓰고 자연이 준 맛으로 요리를 해보려 노력한다.

처음엔 간을 맞추는 것이 너무도 힘들었지만, 간 맞추는 것에 대한 감이 생기고 나니 요리하는 것이 즐거워졌다.
내가 요리를 하는 건 하나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다. 내 요리를 맛보는 이가 있다면 내 요리를 맛보는 순간만큼은 먹을거리에 대해서 걱정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하물며 남에게도 이런 마음일진대 가족에게 건강한 요리를 해주고 싶은 마음이야 오죽할까.

이 때문에 번거롭더라도 끓는 물에 스팸 속 염분을 빼내는 작업을 거치려고 한다.

스팸 속 염분을 좀 빼냈다면, 앞서 준비한 당근과 명란 계란말이를 만들 차례다.

프라이팬에 식용유 대신 참기름을 살짝 펴 발라 전체 코팅을 하고 당근을 볶는다. 씹었을 때 부드럽게 씹힐 정도로. 식용유 대신 참기름을 쓰는 건 내 마음속 고소함이 먹는 이에게 전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그리고 명란 계란말이를 부친다. 얇은 부쳐 낸 계란 물 위에 명란젓을 적당한 크기로 잘라 올려놓고 말면 된다. 말 때 뜨거우니 조심해야 한다.

일러스트 = 헤럴드경제 이주섭


이제 준비는 끝났다. 김밥 김을 펴놓고 그 위에 밥을 골고루 펴준다.

밥 위에 로메인 상추를 얹고, 그 위에 명란 계란말이와 스팸, 단무지를 올리고 잘 말아준다.

명란젓에 짠맛이 있고, 스팸도 염분을 빼긴 했지만, 이 역시 짠맛이 있고, 단무지도 그 나름의 짠맛이 있어 밥양을 너무 적게 하면 짤 수 있다. 식감은 단무지와 로메인 상추, 당근이 식감을 도와줄 것이다.

“역시 아빠가 만들어 준 김밥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어”

명란 계란말이 김밥 역시 성공적이었다. 밥을 너무 얇지 않게 펴 바른 것이 주요했다. 명란을 감싼 계란말이가 짠맛의 완충 역할을 했고, 스팸 역시 한 번 데쳐 힘을 뺀 덕택에 김밥 속에서 튀지 않았다. 로메인 상추가 짠맛을 완화해주고 신선함을 더해줬다.

이제 마지막 김밥용 김 한 장이 남았다.

아빠 마지막은 내가 만들고 싶어

아들은 마지막 한 줄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재료를 넣어 만들고 싶다고 했고, 난 그러라고 했다.

아들의 입맛에 맞춰 당근은 빠졌고 그 자리에 스팸이 두 줄이나 들어가 ‘스팸 가득 명란 계란말이 김밥’이 됐다.

역시나 스팸의 강력한 짠맛이 김밥 자체를 지배해버렸다. 조화로움은 무너졌고 짠맛 군단이 김밥 전체를 점령해버렸다. 아들은 자기가 만들어 놓고도 부담스러운지 내가 만들어 놓은 김밥을 먹는다.

김밥은 우리에게 있어 굉장히 소중한 먹거리다. 어디에서든 맛볼 수 있어 한 끼 식사를 간편히 해결하게 도와주는 고마운 존재다.

사 먹는 김밥은 싸고 간편하게 우리의 배고픔을 해소해 줘서 좋고, 집에서 싸 먹는 김밥은 재료를 고를 때부터 만드는 이의 마음이 담기기 시작해, 재료를 준비하면서 김밥을 싸기까지 만드는 이의 사랑과 정성이 가득 담겨 있어 좋다.

특별한 레시피가 없어도 좋은 재료만 갖추면 그 자체로 맛있다. 재료의 어우러짐이 주는 기쁨이랄까.

일러스트 = 헤럴드경제 이주섭


김밥은 내겐 소중한 추억이 담긴 음식이기도 하다. 어릴 적 유치원 소풍 가던 날 내게 가장 큰 기쁨은 김밥을 맛볼 수 있다는 거였다. 특별한 날 소풍 가는 날에만 맛볼 수 있었던 특별한 존재다.

그 때문이었을까. 나의 어릴 적 유치원 소풍 가서 찍은 사진을 보면 두 다리를 쩍 벌리고 잔디 위에 앉아 누가 뺏어 먹을까 다리 사이에 도시락통을 놓고 김밥을 먹고 있는 내가 있다.

어머니가 정성스럽게 싸주셨던 김밥을 기억한다. 김밥 속 재료가 화려하진 않았지만, 당시 어머님은 내게 사랑과 정성을 가득 담아 싸주셨음을 나는 알고 있다.

김밥과 단무지, 계란만 넣어도 너무도 맛있고, 온 가족이 둘러앉아한 끼의 식사를 해결하며 하하 호호하며 지내던 어릴 적 그때가 떠오른다. 내 어릴 적 행복했던 기억들이 떠오른다.

어쩌면 나 역시 내가 가진 김밥 속 가족의 화목한 모습을 아들의 기억 속에 물려주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아들이 나중에 가장이 되어 가족을 위해 김밥을 싸며 ‘아빠’를 기억하며 보고 싶어 할지 모르니 말이다. 내가 지금 어머니가 보고 싶듯이 말이다.

코로나19로 온 세상이 사회적 거리 두기로 얼어붙어 있는 상황이어서 부모님이 잘 계신지 늘 걱정스러운 날들이다.

안부 전화드리고, 코로나19가 좀 잠잠해지면 김밥 도시락을 싸서 찾아뵈어야겠다.

일러스트 = 헤럴드경제 이주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