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는 여름이면 왈츠 음악과 함께 떠오르는 영화가 있다. 비가 쏟아지는 여름 날, 우산 안으로 뛰어든 당돌한 여자와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말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는 대사와 노을을 배경으로 두 사람이 추는 왈츠가 인상 깊었던 영화. 바로 이병헌, 고(故) 이은주의 주연작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 이다.

인우와 태희는 운명적인 사랑을 하는 연인이다. 하지만 불의의 사고로 태희는 죽게 되고, 17년 후 국어교사가 된 인우는 자신의 반 남학생 현빈에게서 태희의 모습을 겹쳐 보게 된다. 인우는 현빈이 태희의 환생임을 알게 되었지만, 현빈은 인우를 기억하지 못한다. 결국 인우의 이상한 행동에 학교에서 두 사람의 동성애 소문이 돌아 인우는 학교를 떠나게 된다. 그제서야 전생의 기억을 떠올린 현빈은 그를 따라가고, 두 사람은 태희가 가고 싶어했던 뉴질랜드로 함께 떠난다. 그리고 그 곳에서 미래를 약속한 채 줄 없이 번지점프를 한다.

영화를 보고 나면 이런 의문이 든다. 환생까지 하면서 힘들게 다시 만났던 두 사람이 왜 자살을 하는 걸까. 이에 대해 사제지간, 나이 차이, 동성애-표면적으로 보았을 때-라는 굴레 때문에 자살한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 있다. 하지만 그들이 뛰어내리기 전의 대사를 보자. 번지점프대 위에서 현빈(태희)은 장난스럽게 ‘이번엔 여자로 태어나야지.’라고 한다. 이에 인우는 ‘근데 나도 여자로 태어나면 어쩌지?’라고 묻는다. 현빈(태희)은 ‘그럼 또 사랑해야지, 뭐.’ 라고 대답한다. 대화를 통해서 봤을 때, 인우와 태희는 상대의 성별이 어떻든, 어떤 상황이든 간에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니 앞의 이유는 두 사람의 마지막 선택에 대한 답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다음의 내용이 그 대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영화 속에서 인우는 ‘당신 동성애자였어?’라는 아내의 질문에 ‘아니, 난 한 사람만 사랑해. 태희.’라고 대답한다. 태희라는 한 사람밖에 사랑할 수 없는 인우는 현빈을 통해 죽은 태희를 본다. 이를 정확히 말하자면 인우는 현빈이라는 사람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태희의 환생인 현빈을, 더 나아가자면 현빈에게 남아있는 태희의 모습을 사랑하는 것이다. 현빈이 태희의 환생이기는 하지만, 정확히 태희와 동일인물이라고 할 수는 없다. 태희의 특징과 기억을 가지고 있지만, 현빈으로서의 삶을 살아온 이상 현빈은 태희이기 이전에 현빈이라는 한 명의 독자적인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우는 이번 생에서 현빈 그대로를 사랑할 자신이 없었고, 현빈도 이를 알기에 그들은 번지점프대에서 줄 없이 뛰어내린 것은 아닐까.

만약 인우와 현빈이 번지점프대에서 뛰어내리지 않고 계속 살아있었다면 해피엔딩으로 끝날 수 있었을까? 서로를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인우에게는 태희의 근본적인 부재가 남아있고, 태희와 현빈 사이의 간격을 오직 한 사람만 사랑하는 인우가 받아들일 수 있었을지는 알 수 없다. 인우에게는 태희 뿐이듯이, 새로운 태희에게 필요한 사람은 새로운 인우이다. 이는 새로운 태희가 현빈이든, 현빈이 아닌 다른 누구였든간에 상관없이 해당된다. 그래서 그들은 열린 결말인 현재의 생 대신에 ‘또 다시 만나 운명적인 사랑을 할’ 다음 생이라는 닫힌 결말을 선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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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여운을 느끼고 싶으신 분들은 다음 영상을 재생해주세요.)

글 큐레이팅. 김미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