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그만 무례하자

작년 즈음, 그러니까 메갈리아 사이트에서 ‘한남충’이라는 말이 범람할 당시 나는 남성들이 멸어로서 한남충을 쓰는 것을 경계하자고 했다. 나는 여성주의의 맥락에서 가해 집단인 남성 일반과 자신을 유리시키려기 위해 한남충이라는 단어를 가져다 쓰는 남성들을 종종 보았다. 물론 이런 지적에 내가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이 가해 집단에 속한 자로서 여성주의를 논하는 남성들이 지켜야 할 예의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경계가 필요하다고 나와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오늘 또 다른 한남충의 용례를 목격했다. 스스로를 한남충이라고 지목하며 자신과 뭇 남성들을 위로하는 글을 보았다. 더 나아가 가해의 이유에 대해 이해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무지의 변을 이어가며 억울함을 토로했다. 나는 출근길 지하철에서 이 글을 읽고 담배가 갑자기 피우고 싶어 졌다.

변명과 몰이해로 점철된 이 글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아래의 글은 허프포스트 코리아에 올라온 <내가 한남충이다>의 반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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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성가신 여성의 목소리가 평범한 남성들의 목소리를 눌렀을까?

필자는 최근의 여성 혐오의 목소리를 ‘셀럽’들만의 것으로 한정시키며 그들이 경제적 사회적 위치가 확보되어있기 때문에 그들의 목소리만 부각되고 있고 보통 남성인 자신의 목소리가 묻히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최근 여성 혐오와 관련한 굵직한 사건들, 그리고 일련의 흐름을 보면 이해되지 않는 인상비평이다. 메갈리아 사이트부터 시작해서 강남역 10번 출구 살인사건, 성우 목소리 삭제 사건 등의 흐름에서 셀럽의 개입은 찾아보기 힘들다. 평범하고 무력한 사람들의 성토에 의해 이슈가 되고 논란이 이어졌다.

남성들의 목소리가 삭제된 것도 아니다. 별 잘날 것 없는 사람들이 여성 혐오의 현실을 성토하는 글에는 무수히 많은 반대 댓글이 달린다. 각종 커뮤니티에 필자와 같은 논지의 글이 수두룩하게 올라온다. 가끔 기사화도 된다. 다만 덜 주목받는 것처럼 느끼는 것은 이런 이야기가 우리 사회에서 한 번도 제대로 논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상하고 낯선 목소리들이기에 더 성가시게 들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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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성들의 세계’는 굳건하다. 고작 티셔츠를 입은 성우는 그 목소리가 삭제되었으나 ‘개보년’과 ‘처녀성’을 운운하며 여성을 노골적으로 상품화 한 자들의 얼굴은 티브이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여성의 외모를 품평하는 예능프로그램에 대한 비판이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지만 아무도 듣지 않는다. 방대한 데이터로 최근의 여성 혐오 의미망을 분석해 기사로 낸 시사인은 절독 러시에 곤혹을 치르고 있다고 한다.

필자는 “이렇게 살고 있는 한국 남자들이 적지 않다는 걸 주목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맞다. 이 문제는 그 보통 남자들, 바로 우리들의 목소리가 굳건하기 때문이다. 보통 남자들의 목소리가 삭제되었던 시절이 존재하기나 할까?


짝짓기를 생존과 등치 시키는 무례함

필자는 ‘진짜 현실’을 실토한다면서 성비 불균형 때문에 여성들의 숫자가 남성들보다 10~20% 정도 많고 솔로일 수밖에 없는 남성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문제 해결의 시발점이라고 한다. (일단 이 통계부터 문제가 있다. 통계청에서 조회해본 결과 10대에서 30대까지의 남녀 성비는 지난 60년 기록을 통틀어 100:109가 최대이다. 한 번도 10%를 넘긴 적은 없다)

그러나 아쉽게도 비혼의 경향은 성비보다는 경제상황에 더 구애를 받는다. 비혼의 경향이 뚜렷한 일본의 사토리 세대나 미국의 밀레니얼 세대, 그리고 한국의 3포 세대 까지, 이들의 공통점은 성장 둔화와 장기불황의 상황 속에서 나고 자란 세대인 점이다. 취업과 자산 축적이 곤란한 세대의 비혼 선언을 ‘성비’로만 분석하기엔 너무 나이브하다. 최근 10여 년간 초등학교 입학생 수는 2/3로 떨어졌다. 이는 한국의 경제상황과 궤를 같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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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여성과 사적인 만남을 아예 가지지도 못하며 지지리 궁상으로 살아가고 있는”것은 ‘젊은 남성’들 뿐만이 아니며 ‘젊은 여성’과 ‘성소수자’들도 같이 겪는 문제다. 나는 왜 유독 이성애자 젊은 남성만이 젊은 여성에게 “섭섭함”을 느끼는지 이해할 수 없다.

필자는 “나는 지금 여성을 만난다면 정말 잘해줄 자신이 있는데, 안 그래도 여자 친구 있는 녀석들한테 질투가 나는데 데이트 폭력이 어떻고 저떻고 하며 한남충 소리를 듣는다.”라고 한탄한다. 여성 혐오에 대한 ‘보통의 한국 남성’들의 인식이 여과 없이 드러난다. 한쪽은 데이트 폭력과 생존을 부르짖는데 한쪽은 ‘여자 친구 있는 녀석들에게 질투’를 하고 ‘잘해줄 수 있는데 만나주지 않는다’며 한탄을 한다. 나는 자신들의 짝짓기 실패를 누군가의 생존과 등치 시키려는 이들의 행동에 화가 난다. 필자의 말처럼 이건 너무 “엉뚱한 대화”이며 무례한 반응이다.


이해를 구하지 말고 이해를 하세요

필자는 “지금 젊은 남성들이 학교를 다닐 때에는 여학생들이 더 뛰어난 경우도 많았다.”며 학년 대표를 여성이 맡고, 성적 1등도 여성, 대내외 활동이 활발한 것도 여성일 때가 많았다 “고 언급한다. 놀랄 일인가? 여성도 1등을 할 수도 있고 대내외 활동을 활발히 할 수 있고 남성보다 더 뛰어날 수도 있다는 사실이? 그래서 그 ‘잘난 여성들’에게 짓눌린 남성들에 대한 동정이 필요하단 이야기인가?

필자가 학창 시절의 추억을 언급하며 남성들을 위로하는 사이, 한국은 OECD 국가 중 유리천장 지수 최하위를 기록했다. 회사 내 여성 임원 비율은 2.1%, 국회 내 여성 비율은 16.3%다. 임금 차이도 남성이 여성보다 50% 이상 더 받는다. 이런 현실들이 있는데도 필자는 ‘남성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누가 누굴 위로한단 말인가?

더 웃긴 건 최근 페미니즘 이슈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유리천장 문제까지 가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강간을 하지 말아 달라’고 ‘데이트 폭력을 저지르지 말아 달라’고, 이제는 ‘죽이지 말아달라’고 부탁하는 여성들을 향해 신체 건강한 젊은 남성(왜 굳이 신체 건강함을 욱여넣었는지는 모르겠지만)들은 “어떻게든 여성과 만나서 따뜻한 대화를 좀 나눠보는 것”이 인생의 작은 소망이라며 이해를 구하고 있다.

필자는 지금의 페미니스트들이 남성에 대한 이해가 없으며 현학적인 말만 늘어놓는다고 한다. 그런데 그 사실을 아는가? 남성학이란 학문은 여성학에서 출발했다. 페미니즘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남성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남성은 왜 여성 혐오를 하는지, 가부장제에서 맨박스가 남성에게 어떻게 작용하는지와 같은 연구는 지속적으로 있었다. 그리고 이 남성학은 결국 페미니즘(=성평등)으로 귀결된다. 페미니즘은 ‘여성’을 위한 학문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학문이다. 필자의 오해와는 다르게 페미니즘은 지속적으로 ‘남성성’에 대해 관심을 가져왔다.

게다가 논쟁에 참여하는 많은 여성들이 페미니즘의 학문적 정의를 들고 올 때 필자가 주장하는 ‘현학적’인 개념을 가져오지도 않는다. 그저 필자가 언급한 대로다.

“나는 여자 좋아하는데, 내가 왜 여성 혐오야?”

“여성 혐오는 그런 게 아니라 학문적 개념이야. 넌 그런 것도 모르고 이제까지 편하게 살아왔지?”

혐오와 여성 혐오는 다른 개념이고 여성 혐오에서의 혐오는 여성에 대한 개인적인 호오와 관련이 없다는 아주 기초적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학문적 개념이라고 이야기한다. 당신들이 ‘여성’을 무시하기 때문에 ‘학문’의 권위라도 들고 와서 이해시켜보려는 시도는 보이지 않는가?

누가 누굴 이해시켜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어떻게든 이해시켜보려는 여성들의 시도는 지속적으로 있어왔다. 그래서 ‘저들은 우리에게 이해를 구하지 않는다는 말’ 이면에는 안락한 기득권자의 모습이 엿보인다.


‘인간’으로서 아쉬운 점

몇 해 전, 그러니까 내가 여성 혐오란 개념이 존재한다는 걸 인지하고 나서부터야 비로소 나는 여성들의 일상을 전해 듣고 목격할 수 있었다. 만나던 애인은 어느 날 태연하게 ‘오늘 버스에서 어떤 남자가 엉덩이를 만졌다’고 했다. 몇 주 뒤 지하철에서 비슷한 일을 당했다고 했다. 어떤 직장 동료는 지하철에서 허벅지를 만지던 남성을 그대로 두었다고 했다. 너무 빈번한 일이라서 체념했다고 했다. 이전에는 전해 듣지 못했던 세계였다.

회사 회식자리에서는 누군가는 여전히 ‘여자가 없어서 술맛이 안 난다’고 이야기한다. 직장동료는 내게 여자 상사가 ‘여성’이라서 못 믿겠다고 토로한다. 누군가가 회의시간에 몰카를 찍어서 걸렸다고 한다. 정신을 차리고 나서 보니, 이건 너무나 이상한 일상이었다. 스무 살 초반 나에게 여성은 남성보다 못한 존재였다. 낭비와 사치를 일삼으며 일도 제대로 하지 않은 존재였다. 그렇게 인식했고 말을 뱉어왔다. 감히 “직접 하지도 않았다”라고 변명하기도 민망하다.

“책임을 진다는 것” 또한 어려운 문제도 아니다. 단체로 나와서 석고대죄하라는 것이겠는가? 지금 빈번하게 이뤄지고 있는 가해행위를 멈추라는 것 아닌가? 지금이라도 여성 혐오의 현실을 인정하고 인식을 바꿔보자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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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여성 혐오를 타파하고, 성평등을 이룩해야 한다!”고 선언만 하지 않았다. 실존의 위협과 싸우며 자기 생활에서의 운동을 지속하고 있다. 누군가는 ‘메갈’과 같이 ‘과격한’ 방법을 택했겠지만 누군가는 지속적으로 설득하고 이해를 구했다. 그런데 누가 외면했는가? ‘여성 혐오는 없다. 왜나면 남성들도 힘들기 때문이다’라고 궤변을 늘어놓은 것이 누구인가. 필자는 ‘제대로 이해시키지 못한 자들의 책임’을 묻고 싶어 하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묻고 싶다. 이해할 생각이 없는 자들을 대체 어떻게 이해시킬 수 있는가?

나에게 페미니즘은 유별난 게 아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취급받아야 한다는 것. 여성이 남성의 부속물이나 소유물이 아니라 같은 사람이란 것. 그래서 실재하는 부당함과 불평등을 없애자는 것. 나에게 페미니즘은 그렇게 지극히 당연한 것들의 나열이다. 물론 타성에 젖어 스스로의 기득권을 당연하게 여기며 그 부당함을 지적하는 것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나 또한 이해 못하는 바가 아니다. 하지만 그 몰이해의 책임 또한 일상의 침해를 받으며 생존을 하소연하는 이들에게 전가시키는 것은 너무하지 않은가?

마지막으로, 저출산이 그렇게 문제라고 여기면 그 80조를 낭비한 정부에 가서 항의하시기 바란다. 필자가 글에 적시한 대부분은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