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김병철, 안선희)는 1년간 세계여행을 하며, 해외에 사는 이민자들을 만나고 있다.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 문화, 사람들 속에서 살아보는 것도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삶의 방식 중 하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기록을 공유한다.

북아프리카 모로코에서 미국 뉴욕으로 넘어가는 날, 콜롬비아에서 한 통의 이메일이 왔다. 콜롬비아? 많이 들어봤지만 사실 아는 게 거의 없었다. 떠오르는 건 커피, 축구, 마약갱 정도? 콜롬비아는 어떤 나라고, 그곳의 삶은 어떨까? 궁금증이 커지면서 소연씨의 이야기가 무척 듣고 싶어졌다. 몇달 후 콜롬비아 수도 보고타에서 소연씨를 만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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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연(29)
– 거주지 : 콜롬비아 보고타(Bogotá)
– 거주 1년(2016년 12월 인터뷰 기준)
– HS애드 현지 채용 근무(취업비자)

TimeLine
2007년 대학 입학
2008~09년 미국 마이애미 어학연수
2012년 대학 졸업 후 한화 광고회사 한컴 입사
2015년 퇴사 후 콜롬비아로 출국
2016년 6월 디자인 회사 콤마(Komma) 설립
2016년 11월 콤마 매장 닫음
2016년 12월 HS애드 취업(현지 채용)


재미가 없으면, 재미있게 만들어라

고등학교 시절 한국무용을 전공한 김소연씨는 뒤늦게 대학 입시를 준비했다. 세계적인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원대한 꿈을 가진 그에게 어머니는 “그러려면 우리 역사를 먼저 알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런 이유로 재수 끝에 사학과에 입학했지만 대학 생활은 재기 발랄했던 그가 느끼기에 한 없이 지루했다. 그러다 그의 푸념을 들은 선배의 “재미가 없으면 재미있게 만들어야지”라는 말 한마디가 소연씨의 학교 생활을 180도 바꿔 놓았다.

– 이것도 편견이지만 사학과는 소연씨 이미지와 잘 안 어울리는 것 같은데요?

사학과가 너무 재미없었어요.(웃음) 그러다 “직접 재미있게 만들어 보라”는 선배의 제안에 농활 대장을 맡았죠. 할머니, 할아버지 앞에서 공연하고 같이 막걸리 마시고 춤추고 너무 재밌었어요. 근데 다음 농활에선 신청자가 없어서 사학과 농활대를 없앤다는 거예요. 제가 사람들 설득해서 15명을 모았어요. 학과 공부보다는 이렇게 사람들 모아서 노는 게 재밌었어요.

– 대학 2학년 때 어학연수를 갔는데, 미국 마이애미로 간 특별한 이유가 있어요?

스무 살 조금 넘어서 처음으로 외국을 갔어요. 엄마랑 간 베트남, 캄보디아였는데요. 그때 베트남 전통의상인 ‘아오자이’를 입고 다녔는데, 인기가 정말 많았어요. 제가 외국에서 통한다는 걸 알게 됐죠.(웃음) 그 후로 여행을 많이 다녔어요. 브라질 삼바 축제도 가고 인도도 가고요.

마이애미로 간 이유는, 영화 보면 마이애미에 섹시한 사람들도 많고 범죄도 많잖아요. 재미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가야 할 것 같다는 ‘필(Feel)’이 빡! 왔죠. 결과적으로 마이애미에서 지냈던 시간이 제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됐어요.

– 한국에서 어학연수로 많이 가는 곳은 아닌데 그곳 생활은 어땠어요?

영어를 잘 못하지만 외국에선 어떻게든 다 혼자 처리해야 하잖아요. 집에 전기가 끊기면 직접 가서 해결하고. 그렇게 살다 보니 자신감이 생기더라고요. 또 제가 가슴이 약간 큰 데 그게 한국에서는 콤플렉스였어요. 시선도 불편하고 버스 같은 데서 치한도 많았어요. 근데 마이애미에선 “너 참 예쁘다”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고 이상한 시선도 많지 않아 편했죠.

생활은… 맨날 파티 다니고 친구들이랑 어울렸어요. 7개월 동안 너무 놀아서 남은 3개월은 텍사스에 있는 기독교 대학의 부설 어학원으로 옮겼어요. 근데 그동안 너무 놀아서 공부가 안 되는 거예요. 1달 정도 있다가 ‘여행이나 해야겠다’ 생각하고 여행을 떠났죠. 1년 동안 열심히 놀다 보니까 영어는 진짜 많이 늘더라고요.

– 어학연수를 갔는데 어학원을 그만두고 여행을 간 거네요?

어학원을 그만두면 비자가 사라져서 미등록 체류자(일명 불법체류자)가 돼요. 학원에 그만두겠다고 얘기했더니 “너 나중에 미국으로 신혼여행 오고 싶지 않아?” 그러더라고요. 나중에 불이익이 있을 수 있다는 거죠. 근데 전 그냥 “바이(Bye)”하고 나왔어요. 나중에 학생비자가 만료됐다고 이메일이 왔어요.

마이애미에서 만난 한국 친구의 차를 타고 한 달 정도 뉴욕, 시카고, 덴버, 샌디에이고로 미국 횡단 여행을 했어요. 돈 아낀다고 길가에 차 세워두고 자기도 했고요. 몇 년 후에 (취직해서) 라스베이거스로 출장 갔는데 입국할 때 아무 일도 안 생기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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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처럼 뜨거웠던 20대의 마지막

미국 어학연수, 아니 미국 횡단 여행을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온 소연씨는 더욱 자신감 넘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취업은 그리 쉽지 않았다. 여러 회사에 지원했지만 결과는 생각과 달리 매번 낙방이었다. 능숙했던 영어는 미국 파티에서는 빛났지만 한국 취업의 문턱을 넘기엔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러다 우연히 ‘서울 세계 불꽃축제’를 운영하는 광고회사 한컴의 채용공고를 보게 됐고, 그곳에서 승부를 보기로 결심했다.

– 예전부터 축제 기획에 관심이 있으셨나요?

농활 이후 학회실에 ‘레드카펫’을 깔고 크리스마스 축제도 열었어요. 사람들이 내가 만든 축제의 장에서 열광하는 게 너무 재미있었어요. 해외 축제도 많이 다니고, 홍대 페스티벌 같은 곳에서 자원 활동도 몇 번 했고요.

한국은 브라질 삼바 축제처럼 모두 모여서 춤추는 축제는 없잖아요. ‘내가 죽기 전에 우리나라 역사에 남을 축제를 하나 만들어야지’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한컴에서 불꽃축제를 하고 있는 거예요. 이미 그런 축제를 하는 회사라면 내가 다른 것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 불꽃축제면 원하던 자리에 맞게 입사하셨네요.

채용 공고를 보니 마감이 다음 날 오후 3시였어요. 일단 노트북과 엄마 신용카드를 가지고 모텔에 들어갔죠. 밤새 이력서 써서 마감시간에 딱 보냈어요. 근데 제가 원하던 프로모션 쪽이 아니라 광고 AE(기획자)만 뽑고 있었어요. 그래도 ‘일단 AE라도 돼보자’는 생각이었죠. 입사원서를 내놓고 태국 송끄란 물축제에 갔는데 합격 통보가 왔어요. 한국 돌아온 날 배낭 메고, 슬리퍼 신은채 인적성 시험을 보러 갔죠. 그런데 그것도 붙은 거예요!

출근 첫날, 상사가 저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우리가 논의를 해 봤는데 소연씨는 AE로 붙었지만 BTL(프로모션 분야)로 가야 할 것 같아요. 프로모션 쪽에서 능력을 발굴시키는 게 좋을 것 같다는 게 사장님과 임원 전체의 의견이에요” 저는 바로 “감사합니다” 했죠! 속으로 ‘어떻게 이런 기적이 있나’ 했어요.

– 회사생활은 어땠어요?

BTL은 여러 업체를 관리하고, 발주하는 곳이라 신입을 잘 안 뽑아요. 보통 경력직을 뽑죠. 제가 6년인가 만에 뽑힌 신입이었어요. 그래서 다들 많이 예뻐해 주셨어요. 근데 제 팀장님만 ‘죽든 말든 알아서 하라’며 일을 엄청 심하게 시켰어요. 나중에 들어보니 ‘강하게 키우고 싶었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분이 불꽃축제 주 담당자고 제가 ‘서포트’였어요. 2012년부터 그걸 4년 동안 했어요. ‘정말 내 꿈이 이루어지는구나’ 생각하고 밤새도록 일하고, 아이디어도 짜고 재밌게 일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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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미있는 일 찾기가 쉽지 않은데, 원하는 일을 하다가 퇴사를 결심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제가 회사 들어갔을 때가 26살(이하 모두 한국 나이로)이었어요. 근데 영어 프레젠테이션을 해서 예산 10억 원이 넘는 경쟁 PT를 딴 거예요. 회사에서 ‘굉장한 애가 들어왔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인정받으니 즐거웠어요. 근데 몇 년이 지나고 서른을 앞두니까, ‘30’이라는 나이가 너무 무서웠어요. 이젠 사회에 굴복해야 하는 나이랄까. 20대는 뛰어다니고 좌충우돌 부딪히고 누구와 연애를 해도 상관없는데, 서른이 되면 회사에 헌신하고 아이를 가져야 할 것 같은 거예요.

불꽃축제도 자리 잡혀가고 좋았는데 그게 한편으로 무서웠어요. 광고업계에 있으니까 인생이 벅차게도 바쁘더라고요. 엊그제 입사한 것 같은데 눈 떠보니 이미 1년이 지나있고, ‘이렇게 살아도 되나’ 하다 보니 또 1년이 지나가고.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내 인생은 이게 끝이 아닌 거 같은데, 내 인생의 모험은 끝난 거 같지 않은데…’ 대기업 직장에 남자 친구도 있고 돈도 괜찮게 벌고 있으니, 이러다가 결혼해서 애 낳고 평생 이렇게 살 것 같은 두려움이 생겼어요.

익숙한 생활에 빠져들 것인가 아니면 뺄 것인가 계속 고민했죠. 그러다 29살로 넘어갈 때 라스베이거스에서 2015년 새해를 맞았어요. 외국 불꽃축제를 보고 우리 축제의 발전방향을 모색하는 출장이었죠. 아이러니하게도 그 출장에서 회사를 그만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라스베이거스 기념품 가게에서 열쇠고리를 보는데, 이 출장이 다 회사를 먹여 살리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평생 이렇게 살아야 되나?

앞날이 깜깜하더라고요. ‘분명히 세상엔 너무나도 즐겁고 무궁무진한 기회가 있을 텐데’라는 기대감과 아쉬움도 컸고요. 그래서 ‘나를 위해 이기적으로 살아야지. 회사를 그만두고 외국에 나가서 마지막으로 정말 막연한 생모험을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만나게 될지, 무엇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1년만 모든 걸 내려놓고 마음 내키는 대로 살아보고 싶었어요. 사실 이렇다 할 목표가 없어서 두려움은 컸지만 안 하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아서 제 인생을 건 도박을 해보자고 결심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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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스베이거스 출장에서 돌아온 후 바로 퇴사 준비를 하신 건가요?

아니요. 부모님이 (주변에) 제 자랑을 많이 하시고, 남자 친구와 헤어지는 것도 걱정되고 이것저것 걸리는 게 많았어요. 대리 진급도 얼마 안 남고, 연봉도 나쁘지 않아서 더 오래 걸렸죠. 가진 게 많으니까 놓기가 힘든 거예요. 그렇게 8개월을 더 고민했죠.

그때 한 친구가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중요한 거 하나만 선택해. 가지는 쳐내면 되는 거야” 그때 ‘(미래에) 덜 후회할 걸 하자’고 결심했어요. 일은 평생 할 수 있지만, 다른 나라에서 마음 내키는 대로 살면서 새로운 기회의 문을 열어보는 건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남들이 미쳤다고 해도 30살이 조금 넘은 나이에 직장, 돈, 남자 친구가 없는 것뿐이잖아요. 조금 무섭기야 하겠지만 다시 시작하기에 늦은 나이도 아니고요. 결국 8개월 후 2015년 여름에 회사에 얘기했어요. 10월 불꽃축제 끝내면서 퇴사하고, 2주 만에 출국했어요.

-부모님에게는 뭐라고 말씀드렸어요?

아빠는 대학생 때 어학연수도 반대하셨어요. 9장짜리 기획안을 만들어서 부모님한테 프레젠테이션하며 설득했는데도, 미국으로 떠날 때 아빠 얼굴도 보지 못했어요. 근데 이번엔 둘이 소주 3병, 맥주 8병, 막걸리 1병을 해치우고 속을 게워내며 말씀드렸어요. 그때 아빠가 말씀하신 게 가슴에 남아 있어요.

그래, 잘 생각했다 아빠가 살아보니 아등바등 앞만 보고 달려온 게 후회스럽다. 더 젊고 열정이 있을 때 많은 걸 해봐. 아빤 언제나 널 응원하는 버팀목이고 보디가드다 잘 다녀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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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사 비자’로 시작한 콜롬비아 생활

한국을 떠나기로 결심했으니, 이제 살아볼 곳을 찾아야 했다. 그러다 콜롬비아에 있는 ‘살사의 도시’ 칼리(Cali)를 알게 됐다. 한국무용을 했던 소연씨에게 춤은 인생의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다. 주저 없이 선택한 칼리는 그에게 또 다른 기회를 줬다. ‘한번 살아보러 간 곳’에서 사업과 해외취업 그리고 국제연애라는 큰 모험을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모험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왜 남미를 선택하신 거예요? 그것도 콜롬비아로요.

마이애미에 있을 때 ‘남미애 같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회사 다닐 때도 아버지가 브라질 사람이라는 얘기가 돌기도 했어요. ‘그러면 내 조국을 한번 찾아가 볼까’하는 생각을 했죠. 남미에 대한 갈망이 있었어요. 브라질에서 삼바를 췄을 때도 늙기 전에 자유롭게 남미에서 살고 싶기도 했고요.

퇴사하고 정말 갈 수 있게 됐을 때 남미 어디로 갈지 고민했죠. 원 없이 춤추고 싶었어요. 남미는 춤이잖아요! 아르헨티나? 브라질? 삼바를 뜨겁게 춰야 하나? 마이애미에 같이 있던 친구에게 물어봤더니 칼리*가 살사의 도시고, 날씨도 너무 좋다는 거예요. 그래서 별로 찾아보지도 않고 비행기표를 샀어요.

*칼리 : 보고타(수도), 메데인에 이은 콜롬비아 제3의 도시로 콜롬비아 서부에 있다. 관광거리는 많지 않으나 살사 학원과 클럽 문화가 세계 각지의 여행자를 끌어들인다.

– 나 홀로 남미의 도시에 떨어진 건데, 칼리에 처음 도착했을 때 기분이 어땠어요?

‘드디어 나의 섹시함을 꽃피울 수 있는 남미구나’하면서 왔죠.(웃음) 사실 걱정도 조금 됐어요. 오는 비행기에서 ‘내가 정말 지금 뭐 하는 거지? 이래도 되는 건가’ 스스로 혼란스럽기도 하고 엄마가 외교부 사이트에서 (여행경보제도를) 확인했는데 인도도 주황색인데 콜롬비아 칼리는 빨간색이라는 거예요. 칼리를 추천한 콜롬비아 친구를 공항에서 만나자마자 진짜 위험한지 물어봤죠. 아니라고 답하길 기대했는데 “길에서 휴대폰이나 돈을 꺼내면 절대 안 돼. 위험해” 이런 얘기를 들으니 도착하자마자 기분이 안 좋았어요.

일단은 여행자들이 모이는 산 안토니오 지역의 호스텔로 갔어요. 그 친구는 데려다주고 바로 가버렸고요. 남미에 오면 길에서 다 춤추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인사하고 그럴 줄 알았는데 모든 집에 철창이 처져 있는 거예요. 보통 호스텔 주인이 여행 정보를 알려주는데 마침 주인도 없어서 엄청 우울했어요. 2, 3일 동안 친구도 없이 혼자 맥주나 마시면서 방에 갇혀 있었어요. 그러다 4일째 되는 날 마음을 먹고 길을 나섰죠.

사람들한테 “아까데미 살사(살사 학교)?”라고 물어보면서 다녔어요. 겨우 하나 찾아갔는데 문이 닫혔더라고요. 밥도 제대로 못 챙겨 먹고 다녀서 ‘망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렇게 터벅터벅 걸어가는데 어디선가 살사 음악이 들리는 거예요. 혹시나 해서 건물로 들어가 보니 살사 학교였어요.

마침 숙박업도 같이 하는 곳이라 바로 등록하고 방도 옮겼어요. 살사가 저랑 잘 맞더라고요. 점점 실력이 늘다 보니 ‘정식 기관에서 제대로 배워서 동양인 최초로 살사를 정복한 사람이 돼야겠다’고 생각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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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비자를 받으셨어요?

콜롬비아가 한국전쟁 참전국이라 한국과 관계가 좋아요. 처음엔 관광비자로 왔고요. 제가 있던 곳이 공식 살사 교육기간이라 학교 문서를 내니 3시간 만에 1년짜리 학생비자를 받았어요. ‘살사 비자’인 셈이죠. 지금은 취업비자로 바꿨고요.

– 그렇게 좋아하던 칼리에서 왜 보고타로 오게 됐어요?

한창 살사에 푹 빠져있을 때에 훌리안(당시 남자친구)을 만나게 됐어요. 바로 옆방이었거든요. 발코니가 연결되어 있어서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됐죠. 그 친구는 아버지 회사 중에 디자인 회사를 맡고 있었어요. 매일 자신의 사업 이야기에 열을 올리는데 너무 꿈만 장대하기에 오랜만에 광고인의 손길로 기획을 살짝 잡아줬어요. 그때부터 눈빛이 달라지더니 저에게 ‘같이 사업을 해보자’ 제안하더라고요.

그러다가 한 달 정도 에콰도르 여행을 함께 갔다 왔어요. 다녀오고 나니 살사에 대한 열정이 줄어드는 걸 느꼈어요. 그때쯤 살사 학교에 여행자들이 늘어나면서 관광객 허브가 됐고요. 아침 10시부터 늦은 밤까지 살사만 틀어대니 방에서 쉴 수도 없고 미쳐버리겠는 거예요. 게다가 매일 미팅에, 아이디어 전쟁에, ‘스펙터클’하게 일하던 제가 4개월 정도 그냥 놀고 있으니 몸이 찌뿌둥하기도 하고 나중엔 시시해지더라고요. 결국 보고타로 넘어가서 훌리안과 사업계획을 현실화시키게 됐죠.

– 그래도 사업을 결정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더구나 외국에서요.

한국에서도 자기 비즈니스를 하고 싶다는 꿈을 누구나 가지고 있잖아요. 하지만 나 같은 피라미는 뭘 할 수도 없겠다 싶고요. 장벽이 높아서 꿈도 못 꿨는데 남미에서는 좋은 아이템을 찾으면 거침없이 해보자고 생각했어요. 운 좋게 사업 기회가 생겼고 훌리안과 생각도 잘 맞았어요. 그 친구는 디자이너고, 저는 기획자니까 뭔가 될 것 같았죠.

첫 아이템은 링이나 파우치 같은 휴대폰 액세서리였어요. 능력은 있는데 돈이 없는 ‘언더 디자이너’들을 양성하는 큰 꿈을 꿨어요. (홍대에 있는) KT&G 상상마당 같은 아트 플랫폼이요. ‘나의 선진적인 기획과 너의 뛰어난 경험으로 한번 만들어보자. 여기는 물가가 싸니까 우리 자산을 더해서 제대로 시작해보자.’ 그렇게 오프라인 가게까지 하게 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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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리안이 다녔던 대학 앞에 월세 150만 원짜리 2층 건물을 임대했어요. 1층은 가게로 꾸미고, 2층은 매점 겸 디자인 작업소를 만들자고 했죠. 아이디어가 샘솟기 시작했어요. 둘이 밤새도록 얘기했죠. 훌리안은 시도 때도 없이 ‘2층에서 디자이너 양성 프로젝트를 해보고 싶다’며 아이디어를 쏟아내고, 저는 ‘이렇게 하면 상품이 잘 팔릴 것 같아. 처음 돈 벌면 뭐할까’ 설레하면서요. 내 꿈이 ‘골든 러시’를 만난 것 같았어요. 머릿속에선 대기업 나온 한국 여자가 남미 창업 신화를 연다는 꿈이 펼쳐졌어요.

– 사업 초반의 설레었던 감정이 느껴지네요. 근데 원대한 꿈에 비해 운영이 잘 안 됐었나 봐요.

훌리안은 운영하던 디자인 회사 때문에 가게에 있지 못했어요. 저와 직원이 20평짜리 전체 가게 운영을 맡았죠. 문제는 제 스페인어였어요. 기획은 하는데 손발이 잘려 실행을 못하는 거예요. 또 하나는 매장 위치였어요. 대학가는 1년에 4개월 비수기(방학)잖아요. 그리고 주변 상권을 봤어야 했는데 저는 무턱대고 훌리안을 믿었죠. 현지인이고 자기 학교 앞이니까 ‘얘가 뭔 생각이 있겠지’ 싶었어요.

6월에 오픈했는데 8월까지 2달 동안 방학이었어요. 첫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손 발 떨면서 기다렸는데 물건 2개를 판 게 전부예요. 그것도 한 사람이 2개 산 거예요. 사람을 끌기 위해 한국에서 인기였던 봉지 칵테일과 붕어빵도 팔았어요. 근데 학교 앞 엠빠나다(스페인식 튀김만두)가 1,500페소인데, 작은 붕어빵이 2,000페소니까 장사가 될 리가 없잖아요. 방학이라 사람도 없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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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개강에 맞춰서 2층을 오픈했어요. 김밥, 라면도 팔고 입구에 칵테일바도 열었어요. 온라인으로 광고도 내고 음식을 사면 칵테일을 무료주는 이벤트를 했더니 사람들이 엄청나게 몰리는 거예요. 줄도 길게 늘어서고 2시간이면 상품이 동나고, 학교 광고팀에서 촬영 오고 미래가 보이기 시작했죠. 매주 금요일에는 테마별 파티를 여니 다른 학교 학생들도 찾아 오더라고요. 이제 됐다 싶었어요. 그런데 얼마 안 가 인기가 식기 시작했어요.

‘아니, 한국에서처럼 스트레스 안 받으려고 여기까지 온 건데 왜 이렇게 열심히 살아야 해?’라는 안일한 생각에 추석 즈음에 1달 정도 한국에 다녀왔어요. 갔다오니 직원에게 맡긴 가게 상황이 안 좋아졌더라고요. 메뉴도 엉망이 되어 있었고, 디자인 제품은 계속 재고가 쌓인 상황이었어요.

한번 틀어진 운영을 바로잡기가 힘들더라고요. 월세를 내지 못하는 상황이 되고, 훌리안과도 서로를 질책하며 매일 싸웠어요. 어차피 안 되는 건 빨리 접고 차라리 조금 더 준비해서 재오픈을 하자고 결정했죠. 결국 가게를 접고, 1년 계약한 건물 위약금으로 2달치 월세를 냈어요. 6월에 열어서 11월에 닫았으니 반년쯤 운영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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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작하는 콜롬비아 시즌 2

야심차게 시작한 사업은 실패로 끝나고, 콜롬비아에 온지 1년이 지났지만 소연씨는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칼리에서 살사를 추며 여행자로 지냈던 순간도, 6개월 동안 사업을 했던 추억도 잠시 넣어둔 채 그는 다시 직장인의 생활을 선택했다. 한국이 아닌 콜롬비아에서 한국계 회사의 현지 채용으로 다시 회사원이 된 것이다.

– 1년 여행 예산을 얼마나 가져오신 거예요? 사업에는 얼마나 투자하셨나요?

약 3천 만원이요. 1년 동안 남미에서 왕처럼 살아보자 생각했죠. 사업에는 1천만 원 정도 투자했어요. 이름도 투자금도 50%씩 했어요. 둘이 합쳐서 약 2천만 원 정도 쓴 거죠. 앞으로를 위해 아주 비싼 수업을 들었다고 생각하기로 했어요.

– 왜 다시 직장인이 되기로 하셨나요?

돈이 없기도 했고, 사업이 그렇게 즐겁지는 않다는 걸 깨달았어요. 직장은 퇴근이 있지만 사업은 퇴근이 없잖아요. 그러다 한국 광고 회사가 콜롬비아에서 디자인 업무를 할 직원을 뽑는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안 그래도 사업에 회의가 생기고, 돈도 없고, 제가 한국에서 프로모션 업무를 했지만 부족한 부분이 디자인이었는데, 이 일을 맡으면 또 한번 성장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자유롭게 살았는데 어떻게 다시 회사에 들어가나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원래 회사를 다니다가 사업을 해야 하는데, 반대로 하니까 약간 사회에 지는 느낌도 들었고요. 하지만 안정적인 생활에 대한 욕심도 생기는 시점이었어요. 소속이랄까. 한편으로는 한국처럼 일한다면 안 하고 싶었어요. 한국에선 광고주가 새벽에 연락해도 다 받아야 하잖아요. ‘한국과 똑같으면 어떻게 하나’라는 두려움에 출근 전날까지도 고민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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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근해 보니 어땠나요? 스페인어에 대한 부담도 있을 것 같은데요?

회사에서는 모두 스페인어를 써요. 다행히 저도 스페인어로 회의할 정도는 돼요. 한국인 비중은 약 10%고요. 한국 회사는 되게 조용하잖아요. 여기는 사무실에서 음악도 틀어놓고 사람들이 “깔깔깔깔~” 하고 웃어요. 가끔 짜증도 나지만 긴장감은 확실히 적죠.

업무량이나 근무 환경이 한국과 달라요. 더 자유롭고 스트레스가 적어요. 한국은 업무 외에 상사 기분이나 회식, 또 퇴근 눈치까지 신경 쓸 게 많잖아요. 여기는 그걸 다 잘라낸 거예요. 일만 하고 퇴근 시간에 집에 가면 돼요. 남미 특성상 하청업체가 마감을 잘 지키지 않아요. 그래서 전체적으로 업무 마감이 안 지켜져도 이해가 되는 분위기도 있어요.

– 콜롬비아에서 살면서 ‘이런 점은 참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나요?

한국보다 기회가 많아요. 우리나라는 돈 없고 백 없는 젊은이가 새로 무언가를 시도하기 어려운 구조잖아요. 근데 여기는 아직 성장해야 할 부분이 많아서 가능성이 더 있어요. 남미라고 하면 술 먹고 놀 것만 같은데 여기 사람들도 감각 있고, 일 정말 열심히 해요. 한국처럼 빠릿빠릿하지는 않아도요. 물론 콜롬비아가 교육 수준이나 마약같이 아주 크고 오래된 문제가 있지만 열심히 일할 인력은 있어요. 잘 정비된 지역도 있고, 돈 쓸 사람들도 있고요.

그리고 중요한 건, 여기에서는 일만 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적 분위기가 있어요. 돈을 적게 벌더라도 즐겁게 사는 것이 이 나라 대부분 사람들의 인생관이고요. 그러다 보니 사실 업무적으로는 마감도 안 지키고, 변명이 많아서 한국에서 일했던 저는 답답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저도 조금씩 유해지고 일과 삶의 균형을 잡을 수 있는 게 사실이에요. 아침 7시까지 출근하는 게 힘들기는 하지만 오후 5시면 딱 끝나서 폴댄스도 추러 가고요. 한국이었으면 상상도 못했겠죠.

돈을 적게 벌더라도
즐겁게 사는 게
이 나라 사람들의 인생관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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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연씨가 바라본 콜롬비아는 어떤 나라인가요?

직설적이고 솔직한 나라예요. 서로 나이를 따지지 않아서 클럽에는 70, 80대도 있어요. 노인도 젊은 사람과 함께 살사를 추고 즐기면서 살아요. 일할 때도 상하관계가 별로 없어요. 일도 하고 싶을 때 하고, 억지로 하지 않아요. 예전에 인터넷 설치를 신청했는데 기다려도 안 오는 거예요. 연락해 보니 설치기사 휴대폰이 꺼져 있더라고요.

– 치안 때문에 생활이 불편하지는 않나요?

밤에는 절대 혼자 안 나가요. 클럽 갈 때는 친구랑 택시 타고 가고, 휴대폰은 밖에서 잘 안 꺼내요. 훌리안이 예전에 시내버스를 탔는데 남자 둘이 총과 칼을 들고 와서 버스를 다 털어 갔어요. 위험한 지역은 정말 안전하지 않아요. 여기선 털리면 안 쫓아가요. 더 큰 해코지를 당할 수 있으니까요. 사실 보고타만 그런 게 아니라 남미 대도시는 다 그런 것 같아요.

사실 저는 위험하다는 많은 나라도 가봤고, 하지 말라는 일도 나서서 하는 스타일이라서 ‘무슨 일 생기면 생기는 거겠지’라는 생각이었는데 얼마 전에 완전히 생각이 바뀌었어요. 최근에 친구와 쇼핑몰의 영화관에 갔어요. 친구가 휴대폰을 잃어버려서 경찰서에 들르는 바람에 영화관에 조금 늦게 도착했는데, 그때 쇼핑몰에서 폭탄이 터졌어요. 정말 오싹하고 무서웠어요. “아… 내가 콜롬비아에 있구나. 조심해야겠다” 다시 생각했죠.

밤에 혼자 산책도 하고 싶고, 맥주도 마시고 싶은데 그게 안 돼요. 남미를 꿈꾸는 분들께 겁주고 싶은 건 아니지만 작은 일부터 큰일까지 아차 하는 순간에 생길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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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으로의 계획은 뭐예요?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도 있나요?

영주권을 딸 생각도 있어요. 한국에 돌아갈 계획은 없지만 자주는 가고 싶어요. 얼마 전에 한국을 다녀왔는데, 엄마가 콜롬비아에서 배운 살사를 보여달라는 거예요. 그래서 한번 췄더니 다들 일어나 따라 추더라고요. 콜롬비아 가족처럼 밤늦게까지 술도 마시고 같이 살사도 췄어요. 한국에 있는 시간이 너무 소중했고 떠나는 날에는 다같이 많이 울었죠. 새삼스럽게 가족의 소중함을 다시 느꼈어요.

그런데 아직 한국으로 갈 타이밍은 아닌 것 같아요. 이미 한국에서 큰 결정을 했잖아요. 그런 만큼 무언가를 이루어 내고 싶다는 욕심이 있어요. 그리고 솔직히 다시 한국의 무한 경쟁, 무한 야근으로 들어가는 것이 겁 나기도 하고요.

이제 굳이 누군가를 위해서 일하고, 부모님을 위해서 사는 게 아니라 기회가 오는 대로 계속 흘러가 보고 싶어요. 지금 하는 일이 좋으면 계속 일 할 수도 있고, 회사를 다시 그만둘 수도 있겠죠. 어느 정도 더 경험이 쌓이고 예산이 축적되면 다시 한번 사업을 시도해 볼 수도 있고요. 아직 어린 나이지만 전 이기적으로 살고 싶어요.

한국 떠나면서 생각했던,
제 인생의 좌우명인 ‘치열하게 행복하자’처럼
행복을 위해서는 뭐든 하고 싶어요.

– 이민을 추천하시나요?

콜롬비아도 좋고, 다른 나라도 좋은데 이민이라는 게 뭔가 불만이 있어서 오는 경우가 있잖아요. 근데 다른 나라에 가면 또 다른 불만이 생기기 마련이거든요. (남미는) 사람들이 책임감도 적고 시간 개념이 없어서 짜증 나는 일이 많아요. 인생이 예상하지 않은 방향으로 가게 될 수도 있고요.

물론 한국에 산다면 커리어도 쌓이고, (상대적으로) 편안하고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겠죠. 하지만 지금까지 쌓아온 것들을 버릴 만큼 욕심이 있고, 사방에서 불어올 예상치 못한 일에 부딪힐 패기가 있다면, 한번쯤 흘러가 보는 것도 좋은 것 같아요. 순수하게 자기가 집중하고 싶은 일을 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길 수도 있으니까요.

저는 정말 이렇다 할 목표 없이 ‘인생에 다른 문을 열고 싶다. 흘러가듯이 모험을 하고 싶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으로 왔는데 흘러가다 보니 오늘까지 왔네요. 저 개인적으로는 콜롬비아에 온 게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인 것 같아요. 후회하지 않아요. 제 바람대로 이기적인 삶을 영위하기엔 여기가 맞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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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롬비아]
– 기본정보
o 국명 : 콜롬비아공화국(Republic of Colombia)
o 수도 : 보고타(Bogotá, 인구 874만, 고도 2,640m)
o 인구 : 4,875만 명(2016년)
o 면적 : 1,14만㎢(한반도의 5배, 남한의 12배)
o 언어 : 스페인어, 200여 토착 인디언어
o 인종 : 메스티소(58%), 백인(20%), 물라토(14%), 기타
출처 : 외교부

– 이민 정보
주콜롬비아 대사관


글쓴이의 한마디 : 저희가 만난 분들의 이민 이야기는 그분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다른 환경에서 태어나 다른 방식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자신의 삶과 비교하지도 말고, 함부로 재단하거나 동경(혹은 훈계) 하지도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냥 ‘저 사람은 저런 선택을 했구나’라는 정도의 시각으로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016년 7월 18일부터 1년 세계여행을 떠났습니다. 오세아니아, 아시아 이민 5~15년 차 분 중에 저희 인터뷰 콘셉트에 적합한 분을 알고 계시다면 추천해 주세요. 5년 이상 이민생활을 했다가 한국으로 돌아온 분들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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