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완벽한 봄이다.”
그렇다. 나는 날씨에 무감각해서 눈보라가 치는 날 코트를 입고, 폭염에 가디건을 걸치고 나오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런 날씨 모지리도 여자친구가 생기면 날씨에 신경을 쓴다. 아니 써야만 한다. 오늘은 정말 완벽한 봄이다.
날씨도 완벽하고 시간도 탱자탱자 노래를 부른다. 우리는 오늘 멀리 떠나기로 했다. 벚꽃이 아름다운 남해! 우리는 벚꽃축제가 열리기 전에 이곳을 방문해 여유롭게 벚꽃을 즐길 것이다. 나는 고등학교 담임선생님의 말씀을 되새겼다. “뭐든 성공을 하려면 반박자가 빨라야 한단다.”
드디어 버스에서 내렸다. 만개한 개나리들만이 우리를 맞아주었다. 네가 여기서 왜 나와?
분명 노래를 들었단 말이야
벚꽃연금 같은 그것을…
나는 자그마한 목소리로 변명을 중얼거릴 뿐이었다. 벚꽃은 무슨 팝콘 비슷하게 생긴 것도 찾아볼 수 없는 이곳에 오기 위해 휴가를 내서 멀리 버스를 타고 오다니! 생각을 곱씹을수록 벚꽃이 미워진다. 망해라!
우리는 벚꽃충격을 벗어나기 위해 자리를 떠났다. 이럴 때는 한 잔의 음료가 우리를 진정시켜 줄 수 있다. 나는 가까이 있는 편의점에 들어갔다. 그곳에는 예상치 못한 음료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작년에 봤던 스파클링
벚꽃이 되어 또 왔네
딸랑. 편의점 문을 열며 우리는 음료수 칸으로 향했다. 그런데 우리를 맞이하는 저 분홍 음료수는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벚꽃 스파클링’ 지난해 GS25 편의점에 꽃 탄산음료라는 장르를 열어준 그 음료수다. 그런데 GS25 형들 작년에 분명 벚꽃 스파클링은 한정판이라며.
물론 달라진 점이 있다. 분홍분홍 한 벚꽃 스파클링 옆에 연두색의 벚꽃 스파클링이 추가되었다. ‘벚꽃 스파클링 청포도 에이드’다. 벚꽃 맛은 무엇일까 마시고 있어도 몰랐던 벚꽃 스파클링과 달리 이 녀석은 익숙한 맛이 난다. 맛은 포도 봉봉인데 알갱이는 코코팜이다.
하지만 벚꽃 스파클링은 타이밍을 잘못 맞췄다. 우리 마음속 벚꽃은 피기도 전에 모두 졌다고! 여자친구와 나는 씁쓸한 기분을 감추지 못하며 편의점을 떠났다. 물론 벚꽃 스파클링을 2캔씩 구매했다. 가격도 천 원이거니와 이것도 시즌 한정으로 판매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한정이면 사야지.
한적한 카페에서
벚꽃 라떼나 할까?
진짜 벚꽃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 벚꽃이 그려진 음료수로는 우리의 마음만 아프게 할 뿐이다. 우리는 지친 몸과 마음을 쉬게 하기 위해 카페로 향했다.
우리는 이디야로 향했다. 공간이 넓어서 아무도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을 것 카페. 나는 무심코 신상 메뉴를 시켰다. 진동벨이 울려 갔더니 불길한 분홍색의 음료가 나왔다. 이름하야 ‘벚꽃 라떼’ 맙소사 제발! 분홍색 라떼 위에 하얀 휘핑크림이 쌓인 이디야의 새 음료. 휘핑크림 위에는 떨어진 벚꽃잎처럼 라즈베리 초콜릿이 장식되어 있었다. 아, 이건 너무 벚꽃이잖아.
그렇다고 이디야를 간 것을 후회하진 않는다. 만약 스타벅스를 갔다면, 벚꽃 관련 음료수가 3개나 된다(벚꽃 라떼, 벚꽃 프라푸치노, 벚꽃 밀크티). 심지어 거기는 텀블러와 머그컵도 벚꽃이다. 세상 벚꽃은 다 스타벅스 굿즈로 환생한 게 아닌지 의심될 정도다.
나는 슬플 때
벚꽃 맥주를 마셔
편의점도 카페도 이미 벚꽃에게 잠식당했다. 벚꽃의 모습이 질리기 전에 가짜 벚꽃의 습격을 피해야 한다. 우리는 비상식량인 맥주를 챙겨서 방구석에 숨어있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맥주 코너 역시 꿈과 희망이 없었다. 벚꽃만이 그려있을 뿐이다.
‘클리어 아사히 벚꽃축제’는 벚꽃시즌을 맞이하기 위해 상큼한 향과 맛을 내는 홉을 소량 추가했다고 한다. 물론 벚꽃나무 아래에서 이 맥주를 마실 연인들에게나 추천할 맛이다. 아사히가 하면 기린 이치방도 한다. 하지만 기린 이치방 벚꽃 에디션은 포장지만 봄을 타는 맥주였다.
사실 난 가방에
벚꽃사케를 들고 다녔지
“벚꽃은 안 보이고 왜 벚꽃 음료수만 보이니.” 여자친구의 한탄에 무언가 생각났다. 지금 내 주머니에 든 이 음료수 때문인가? 사쿠라 사라사라 일명 ‘벚꽃사케’다. 계획대로라면 우린 만개한 벚꽃나무 아래에서 이 벚꽃사케를 나눠 마셨어야 했다.
벚꽃사케는 비주얼부터 완벽하다. 전구 모양의 병에 분홍빛 사케가 담겨있는데, 사케 안에 동동 떠다니는 벚꽃이 매력 포인트다. 과일소주 맛이 나고, 도수도 11도라 우리가 알딸딸 기분이 좋게 마실 수 있다. 일본에서 힘들게 구해왔는데. 나는 이 녀석을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음료수를 모으니
벚꽃축제가 일어난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음료가 있다는 옛말이 있듯이(물론 없다). 새로운 음료수를 테이블 위에 놓아두자 눈 앞에 벚꽃 군락지가 펼쳐졌다. 이렇게 저렇게 모아서 사진을 찍어보니 벚꽃축제가 부럽지 않다. 심지어 음료수라서 눈으로 보다가 마실 수도 있다고!
실망감에 찾아온 마음의 겨울은 사르르 녹아버렸다. 음료수면 뭐 어때. 그녀와 나는 우리만의 벚꽃축제를 즐긴다. 역시 이 분홍빛의 꽃잎은 사람을 낭만적으로 만드는 것 같다. 정말 완벽한 봄이다. 벚꽃 만세. 벚꽃 만만세.
마실 수 있는 모든 것, 마시즘 [원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