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내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

광화문 사거리 교보빌딩 1층 파리크라상

“얼굴이 수척해지셨어요… 무슨 일 있으신 건 아니시죠?”

오랜만에 만난 선배의 얼굴에 피곤함이 가득하다.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았다.

“스트레스 관리가 중요해요. 건강하셔야 해요. 몸도 마음도요”

자연스럽게 우리는 요즘 우리가 사는 이야기를 성토했고, 그러다 한 선배의 이야기가 나왔다.

그 선배는 요새 잘 지내세요?

“최근에 들은 바로는 요새 술도 끊고 집에도 일찍 일찍 들어가신다고 하던데…”

선배의 최근 동향은 가히 놀라울 정도였다. 나름 그 나이대 동년배에 비해 사회적으로는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었지만, 정작 그 선배의 삶은 평화롭지 않아 보였다.

일러스트 = 헤럴드경제 이주섭


물론, 당연히… 술을 끊는 것은 축하할 일이다. 적어도 술에 취해 정신줄을 놓아 위험에 빠질 일은 없어진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주변 이들과의 만남 자체까지 파격적으로 줄이셨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내심 걱정됐다.

“제가 며칠 전 들은 이야기인데요. 제 아는 분의 매형이 올해 초 60세에 정년퇴직하시고 집에서 쉬고 계시 대요. 두어 달 전에 뵀는데 몸매가 20대 체형이어서 놀라셨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매형분한테 ‘어떻게 이렇게 몸이 날렵해지셨냐?’라고 물으니….. ‘할 게 없어서 매일 4시간 걷다 보니…’라고 하셨다네요..”

“맞아. 퇴직하고 나면 남자들이 겪는 외로움이 크다고 하더라. 직장 다닐 때야 직장이라는 울타리가 있으니 그나마 찾아주는 이도 있었겠지만, 퇴직하고 나면 그마저도 없고… 설상가상으로 더 이상 들어오는 수입도 없으니 주머니 사정 생각하면 주변 사람들 만남에 소극적이 될 수밖에…”

형수님과 아이들하고는
사이가 좋으신 거겠죠?

“…..”

선배는 30대와 40대를 앞만 보고 달려가다 보니 외부 활동 비중이 가정에 쏟은 시간보다 비교가 안 될 정도였다고 한다. 자연스럽게 아내와 아이들이 아빠가 필요로 할 때 많은 시간을 함께 해주지 못했을 터. 당연히 자식들의 어릴 적 기억 속에 아빠는 ‘부재중’이었고, 이제 중고등학생이 된 아이들에게 50대가 되어 가정에 충실해지려고 애쓰는 아빠는 가족이긴 하지만 가까이하기엔 먼 당신인 셈이다.

“사실 아이들과 친해지려면 어릴 때 많이 놀아줘야 하는데… 사면초가네요…”

“그나마 점수를 잃지만 않으면 다행인 것 같아. 어휴…”

선배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안타깝게도 갑작스러운 가정적(?)인 남편 커밍아웃으로 형수님과 아이들이 오히려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듯하다는 것이다.

술을 끊고 집에 일찍 들어오다 보니 맞벌이를 하고 있는 형수님과 그동안 아빠의 통제 밖에 있던 아이들에 대한 내정간섭이 점점 강화됐고, 이것이 가정 내 불화의 불씨가 되는 것 같다는 것이다.

“아… 차라리… 그냥 술은 안 드시더라도 주변 사람들과 만남은 계속 이어나가시지….”

문득 최근 마음속 그늘이 어두워지고 있는 한 형님이 떠올랐다. 요새 자주 만나며 그 형님의 속이야기를 많이 들으려 하고 있고, 깊은 어둠을 먼저 겪은 나는 그 형님께 ‘관점’의 전환을 알려드리려 부단히 애쓰고 있다.

그 형님도 이 선배와 비슷한 경우다. 형님도 이제 51살이 됐다. 임원이 되기 위해 30대와 40대를 직장에 헌신했지만 사실상 더 이상 승진은 어렵다고 판단했고, 이제 많은 부분을 내려놓으며 가정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다. 하지만 두 딸은 어느새 훌쩍 컸고 첫째는 올해 스무 살이 됐다.

요새 일찍 집에 들어가지만 즐거움보다는 외로움이 더 크다고 했다.

직장에서도 외롭고, 집에 가서도 고독하니 그 형님을 반기는 것은 ‘어둠’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형님을 만나 대화 나누다 보면 ‘우울’함이 스믈스믈 내게 흘러들어왔고, 난 단호하게 형님께 병원을 다녀볼 것을 권했다.

고마워
네 덕택에
한 달 만에 숙면을 취했네

다음 날 아침 형님에게서 한 통의 메시지가 왔다. 역시 형님은 불면증을 앓고 계셨다. 거기에 최근 감정 조절에도 애를 먹고 계셨다고 했다.

“형님 오늘도 잘 이겨내시리라 믿어요! 좋은 생각만 하시고 오늘도 건강하세요. 몸도 마음도요”

이날 이후 매일 아침 이렇게 형님께 안부 문자를 보낸다. 긍정적인 기운으로 가득 찬 하루의 시작이 됐으면 해서다.

사실 난 오지랖이 넓다.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를 듣고 내가 듣고 경험한 바를 전하며 내가 느꼈던 마음의 울림을 함께 느껴보길 바라는 마음이 크다.

그래서 늘 주변에 어둠이 깃들거나, 고민이 있는 친구들에게 먼저 다가가 말을 건네곤 한다.

하지만 최근 내 접근 방식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늘 여기저기 오지랖을 떨고 다니는 내게 날 아끼는 후배가 이런 말을 했다.

“설득이든 뭐든 내가 느끼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상대가 느끼는 게 중요한 거죠. 잘해주는 것도 내가 상대 빚지 우려고 하는 경우 많아요. 상대가 고마움을 느껴야 고마운 거지, 내가 많이 잘해줬다고 상대가 고마워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요”

문득 그 선배의 입장에서 생각해봐야 한다고 생각이 들었다. 난 지금도 너무 내 입장에서 그 선배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해서다.

그 선배는 술을 끊고
대외 활동을 줄인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옳은 결정이라 믿을 것이고, 가정 내에서도 가장으로서 역할을 잘 수행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 것이다.

선배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삶의 터닝포인트를 경험한 것일 수 있다. 그 무언가 알지 못하는… 어찌 보면 마음의 상처가 깊었을지도 모르겠다.

초등학교 시절 흥얼거리며 따라 불렀던 김국환 님의 ‘타타타’가 떠올랐다.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
한 치 앞도 모두 몰라 다 안다면 재미없지
바람이 부는 날엔 바람으로
비 오면 비에 젖어 사는 거지
그런 거지~ 음음음 어 허허~
산다는 건 좋은 거지 수지맞는 장사잖소
알몸으로 태어나서 옷 한 벌은 건졌잖소
우리네 헛짚는 인생살이 한 세상 걱정조차 없이 살면 무슨 재미~ 그런 게 덤이잖소
아 하 하 하 하 ~ ~
아 하 하 하 하 하 하 하 ~ ~

우리가 오늘 브런치를 먹은 이 곳. 광화문 사거리 교보빌딩 1층에 위치한 파리크라상.

일러스트 = 헤럴드경제 이주섭

사실 우리는 파리크라상을 찾으면서 왜 파리크라상인지 알지 못한다. ‘그냥 이름이 유럽풍이네’ 정도 랄까.

내가 파리크라상을 처음 알게 된 것은 28살 수험생 시절이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인사동 한 레스토랑에서 수험생활에 들어가는 용돈을 벌기 위해 주말 아르바이트하면서다. 사장님은 브런치 손님을 위해 준비할 빵을 꼭 ‘파리크라상 빵집’에서 사 오라고 신신당부하셨다. 외국인 관광 손님과 분위기를 즐기기 위해 당시 고가의 레스토랑을 찾아온 손님에게 본인의 기준에서 가장 신선하고 좋은 빵으로 대접해야 한다는 신념에서였다.

당시 나는 주말 아침이면 빵이 나오는 시간에 맞춰 인사동에서 매장까지 1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걸으며 ‘갓 구운 빵’을 사 오곤 했던 기억이 있다.

찾아보니 파리크라상은 본사 직영으로만 운영된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제빵왕 김탁구’하면 떠오르는 파리바게뜨를 운영하는 주체이기도 하다. 파리크라상이란 이름에는 유럽풍 베이커리 문화를 한국에 접목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한다.

베이커리 사업에서 큰 성공을 이룬 파리크라상은 파리바게뜨, 파스쿠찌, 쉐이크쉑, 리나스, 라그릴리아, 패션5 등의 다수의 브랜드를 운영하는 기업이 됐다. 지금 파리크라상은 유통가의 ‘삼성’이란 애칭(?)을 받으며 비판받는 일도 많지만…

그럼에도 파리크라상이 국내 베이커리 시장에 기여한 바를 부정하진 못할 것이다.

사실 그 선배도 30대와 40대 외부 활동으로 가정을 소홀했고 그에 따른 인과응보가 된 것 아니냐고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다. 하지만 선배가 외부 활동을 하며 벌어들인 경제적 풍요로움이 가정 살림에 긍정적 여유를 주었음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

요새 나는 깨닫는다. 20대 때에는 사랑만으로도 살 수 있다고 믿었지만 40대가 되고 지금 이렇게 나라 경제가 어려워 가계 수입으로 수많은 이들이 고통받는 지금에서야…

이날 선배와 난 파리크라상에서 브런치를 했다.

“광화문 사거리 인근에는 정말 맛있는 빵집을 찾기 어려운 것 같아. 아이들이 빵을 좋아해서 퇴근하고 빵을 사 가서 같이 먹는 것도 그 나름대로 삶의 낙이거든. 그래서 여기 파리크라상을 찾곤 해. 비싸긴 하지만 확실히 파리크라상 빵은 아이들이 좋아하긴 하거든”

더 좋은 것을 아이들에게 가져다주고 픈 마음은 어느 부모나 똑같을 것이다. 어찌 그 마음이 부족하다고만 탓할 것인가…

요즘 주변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이 아프기도 하고, 나도 반성해야겠다는 부분이 많다. 그런데 뭐가 맞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저 혼란스럽다.

난 늘 고민한다. 일과 가정의 밸런스에 대해서. 하지만 둘 다 잘하기는 쉽지 않다. 나름 열심히 한다고 하지만 일과 가정에서 모두 좌절감을 느끼게 될 때면…. 이런 생각이 든다…

“내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

일러스트 = 헤럴드경제 이주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