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게임 정말… 이 게임 이거 정말 하나의 인생이 있구나… 이게 뭐라고…. 이렇게 나는 빠져들고 있는 걸까…

22화. 맹주님 성소를 지켜야 합니다

평화로운 날

육아에 지쳐있는 아내에게 쉼을 선사하기 위해 무주로 여행 왔다. 매년 찾는 이곳은 여유로움이 있어 좋다. 게다가 10월이면 푸른 하늘에 탁 트인 전경, 무엇보다 곱게 물든 단풍이 절경을 이룬다. 그렇게 난 모처럼 아내와 아들과 함께 평화로운 휴일을 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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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주님 환영합니다!

평화로움 속에서 아내와 아들은 낮잠을 청했고, 잠깐의 휴식을 즐기기 위해 난 게임 속 맹주로 돌아갔다.

게임 내 마련돼 있는 연맹방에 대화가 빠르게 오고 가고 있었다. 살펴보니 우리 아래쪽에서 관문을 점령하고 있던 연맹이 관문 너머로 진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우리와 같은 본맹을 가지고 있는 연맹이었고, 그들의 목표는 우리 옆에 있는 연맹이었다

이미 전조는 있었다

우리는 평화를 지향한다. 성소를 점령하고 있는 우리 우측에 있는 연맹과의 싸움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러던 중 우리 아래쪽 관문을 점령하고 있는 연맹 외교 임원으로부터 한 통의 메일이 왔다.

나는 위 연맹을 공격할 예정이니, 해당 연맹과 그 어떠한 소통도 하지 말길 바람

이런 내용이었다. 최소한의 예의는 볼 수 없었고 그저 지 할 소리만 하는…. 게다가 우리 연맹에는 외교 담당 임원이 있었으나 이들은 우리를 얕보듯 맹주인 내게 직접 명령조로 메시지를 보냈다.

상대에 대한 존중은 전혀 없었고, 그런 최소한의 예의는 개의치 않아하는 듯 보였다. 이는 둘 중 하나다. 현실에서도 예의란 것을 찾아보기 힘든 부류의 인간이거나 괴팍한 성정을 가진 이거나…

해당 연맹에 답신을 보냈다

상대가 개판일수록 나의 예의바름은 더욱 빛날 수 있다. 난 최대한 정중하게 예를 갖춰 메일을 썼다

친애하는 동맹군이여 우리는 현재 해당 연맹이 차지하고 있는 성소를 점령하기 위해 전쟁을 준비하고 있소. 혹시 우리 역시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으니 공격 일시를 알려주면 함께 개시하겠소. – 당신의 성실한 동맹군 맹주 올림

잠시 후에 답신이 왔다

우리는 혼자서 공격할 것이다. 방해하지 마라.

메일을 받고 난 뒤에 내게 찾아온 것은 깊은 빡침…. 이건 뭐…. 아무리 외국인이라지만 원래 이놈들 말투가 이런 건가… 싶었다… 그래서 연맹의 세력을 보니 우리보다 세력이 크지 않았다. 우리를 얕볼 수 없는 세력이었다. 알 수 없는 놈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고 오늘 그들은 위로 치고 올라오기 위해 병력을 관문 앞에서 집결하고 있었던 것이다.

선택을 해야 할 시기

성소를 점령하고 있는 연맹, 우리의 동맹군으로부터 공격을 받은 연맹 맹주가 다급하게 나를 찾는 메일을 보냈다.

친애하는 맹주님 우리는 과거 평화협정을 맺은 바 있습니다. 지금 아래에서 공격이 들어오고 있는 상황이니, 우리를 도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당신의 성실한 맹주로부터

해당 맹주는 게임 속에 자신의 사진을 걸어놨다. 나이가 꽤 있어 보이는 사진이었다. 역시나 메일은 깔끔했으며 상대방에 대한 존중이 한껏 담겨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의 전쟁에 참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동맹군의 공격을 우리가 저지할 명분이 없어서였다. 힘이 되어주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며 답신을 보냈다.

친애하는 맹주님 우리는 당신을 도울 수 없어서 유감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우리 동맹군의 공격을 잘 막아낸다면 우리의 평화협정은 유효합니다. 부디 잘 방어하시길… 행운을 빕니다. – 당신의 성실한 맹주로부터

답장을 받은 맹주는 곧 회신을 보냈다. 짧고 단호한 메시지여서 방어하는데 정신이 없는듯했다. 사실 대화를 나눠보면 알게 된다. 사람의 매력에 대해서.

이전까지 충분한 대화를 하지 못한 상태에서 난 해당 연맹이 가진 성소를 우리가 어떻게 해야 가져올 수 있을까만 생각했다. 우리 연맹 임원들도 우리도 성소를 점령해야 한다고 내게 강력하게 주장하곤 했다. 우리가 해당 연맹과 성소를 차지하기 위한 명분으로 전쟁을 준비해온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하지만 막상 대화를 해보고 해당 연맹이 공격을 당하는 것을 지켜보니 예전 우리가 힘이 없을 때 무참히 짓밟혔던 때가 떠올랐다. 그래서 마음이 좋지 않았다.

맹주님 맹주님!!!
동맹군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성소로 진격합니다

헉…… 이런 날벼락이 있나……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맹주방에도 해당 사실을 알렸다. 맹주방에서는 “성소는 먼저 점령한 사람의 것입니다”라는 회신을 받았다.

우리도 성소를 차지하기 위해 깃발을 빠르게 확장해야 했다. 동맹군도 우리가 성소로 나아가는 것을 의식했고 내게 메일이 왔다

성소로 나아가는 것을 멈춰라. 당장.

이건 뭐…. 정말 예의가 1도 없는….. 게다가 해당 메일을 보낸 건 거기 맹주도 아니고…..

해당 메일을 우리 임원방에 공유하니 임원들은 분개했다. 상대의 예의 없음에. 임원방은 금세 불타올랐다. 전쟁도 불사한다는 의견이 도배했다. 난 그들을 진정시키고 맹주방에 관련 내용을 알리고 우리의 분위기를 전달했다.

그리고 잠시 뒤….. 본맹 맹주가 나를 찾았다.

맹주님 제가 정리했습니다. 해당 연맹에서는 성소로 진격을 멈추고 철수할 것입니다. 다만 공격에서 이긴 부분이 있으니 땅은 나눠가지시면 좋겠습니다.
본맹 맹주이지만 상대를 존중하는 말투였다. 사실상 나눠가지라는 말이지만 톤앤매너는 너무도 부드러웠다. 우리는 성소를 차지하는 것이 목표였기에 흔쾌히 본맹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우리도 성소를 가지게 됐다.

연맹방에서 터져 나오는 환호성

연맹방에 맹주방에서 결정된 내용을 전달했다. 모두가 환호성을 내질렀다. 희열을 느끼는 듯했다. 그토록 원하던 성소를 차지했다는 것에 대만족 했다.

나는 순간 미묘한 감정에 휩싸이며 잠시 감상에 젖어들었다.

이 게임 정말… 이 게임 이거 정말 하나의 인생이 있구나… 이게 뭐라고…. 이렇게 나는 빠져들고 있는 걸까…

어려웠던 날들… 공격이 들어올까 노심초사했던 날들…. 하지만 이제 우리는 그 어떤 세력도 만만하게 보지 못하는 하나의 연맹으로 자리 잡았다. 모두가 어려울 때 같이 소통하고 ‘분노의 렙업’을 외치며 전투력을 키워야 한다고 다독이며 하루하루를 보냈던 날들… 모든 것들이 주마등처럼 내 머릿속을 흘러갔다…

매일매일 사건사고가 발생하는 이 게임 속 세상….

하….. 이제 우리에게 또 어떤 일들이 닥쳐올까… 아니 우리에게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난 연맹원분들께 고맙다는 인사를 올렸다. 그러고는 생각했다. 이 게임….. 점점 빠져들고 있다….. 는 생각…

무엇보다…… 영화 속 레디플레이어원과 같은 세상에 내가 주인공이 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뭔가 미묘한 감정이 마음속 전율을 일으켰다.

어쩌면 현실 속에서 소외받는 많은 이들이 이러한 게임 속 역할을 통해 위로받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큰 일이다. 점점 빠져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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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 헤럴드경제 이주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