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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오빠 미루기 해야돼. 얼마나 미뤄?“
“최대한. 얼마까지 미룰 수 있는데?”
“40번째까지.”
“어 미뤄-.”

 떡볶이 하나에, 이럴 일일까 생각했다. 지난번에 인천에 여행을 왔을 때는 워낙 이른 시간에 마감이 되는 바람에 아내는 아예 예약을 걸지도 못했다. 이번엔 낮 11시쯤 출발하기로 하고, 그보다 조금 일찍 앱으로 온라인 줄서기를 했는데 56번째. 허얼.

 인천의 남동공단까지는 50여분이 남아있었고 40번째의 순번으로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나는 가면서 몇가지 추론을 해봤는데 떡볶이 집이니 뭐 으리으리한 곳은 아닐 것이고 공단이라. 어떤 사람들이 와서 먹는 곳일까…는, 솔직히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와서 보니, 와.

 떡볶이집은 전형적인 밀집지역의 낡은 상가에 위치하고 있다. 오픈시간이 7시. 라는 말은, 노동자들이 아침식사로 간단하고 저렴하게, 또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갈 수 있는 분식집이기도 하단 것이고, 아마도 공단의 역사와 버금하게 오래 자리잡아온 곳일 터이다.

 주말이야 이처럼 외지에서 손님이 밀어닥치지만 평일엔 공단에서 손님들이 간단히 한끼 하고 가겠지.

 낡은 식당 내부는 의외로 넓었다. 으레 이런 낡은 분식집은 2 제곱미터도 안되는 공간에서 사장님이 혼자서 조리하며 네댓 개의 테이블에 손님을 받는데, 장사가 잘 되어서 옆 상가 칸까지 확장을 한 것일 터. 메뉴판 깔끔하고 셀프로 국물을 뜰 수 있게 해둔 것도 편리해 좋다.

“뭐 시켰어?”

“일단 2인분이랑 김밥 하나.”

“순대순대. 이런 노포면 순대도 먹어줘야지.“

“어 시킬게.”

 원래는 굳이 나는 떡볶이집에 따라와서 순대를 요청하진 않는다. 아내가 당면순대를 좋아하지도 않거니와 튀김이라는 좋은 서브메뉴가 있기 때문. 그러나 떡볶이집의 외관과 입지에 이끌려서 보다 구색을 맞추어 먹기로 했다. 예상대로, 순대는 평범~한 순대다. 대신, 국물이 넉넉하게 부어져나왔으니 찍어먹어볼까.

 그런데, 떡볶이가 의외다.

“허어…진짜 그 때 그 맛이네.”

“내가 좋아하는 맛이야.”

 진짜로, 그 때 그 맛.

 내 기억 속 최초의 떡볶이는 초등학교 앞 작은 떡볶이집이었다. 당시 돈 100원을 내면 손바닥만한 옛날 분식집 접시에 멀건 국물 속에서 끓여진 밀떡이 대여섯 점 나왔다. 뜨끈뜨끈 국물 속에서 떡볶이를 후루룩 집어먹으면, 당시 기억에도 멀겋고 달았다. 그 떡볶이집은 그래도 초등학교 앞에 위치한데다 그 위엔 학원과 태권도장까지 있어서, 어린 시절 퍽 오랜 시간 그곳을 들렀다. 그러니까 남동공단 떡볶이는, 딱 그 시절 먹던 그 맛이 났다. 다만, 훨씬 맛있다. 달고 짜고 맵고, 국물은 가볍고, 그래서 텁텁하지 않으며, 깔끔하게 넘어갔다.

“이게, 국물이 가벼워서 순대를 찍어먹을 수가 없네.”

“응? 그게 왜?”

“봐봐. 떡볶이 국물에 튀김이나 순대 찍어먹는 게 아마 90년대 후반? 그때쯤 생겼을 거야. 그래서 국물떡볶이라는 게 따로 분류가 됐고, 튀김이랑 순대에 국물이 묻어나야 하니까 국물이 진해졌지.”

“응.”

“이건 떡볶이 국물에 튀김을 찍먹하는 문화가 생기기 이전 스타일이란 말이야. 그래서 국물이 진하지 않잖아. 원래 국물떡볶이는 순대를 찍어먹으면 순대 냄새가 떡볶이 국물에 가려져야 하는데, 여긴 순대를 찍먹해도 순대 내음이 그대로 남아. 국물이 가벼워서.”

 아무래도 순대를 시키길 잘한 것 같다. 떡볶이집의 정체성을 보다 잘 알 수 있으니. 떡볶이 문화 역시 내가 살아가는 동안 여러차례의 변화가 있었다. 대체로 국물은 더 진해졌다. 그리고 떡볶이에 “토핑”하거나 “버무리”하는 것이 발전했다.

 그러나 남동공단 떡볶이는, 그런 문화가 생겨나기 이전, 80년대에서 90년대 초중반까지의 떡볶이의 모양새 그대로다. 진짜로 그 때 그 맛에, 떡은 탱글하고 국물은 칼칼 시원하다. 김밥은- 심플하다.

 어묵 국물은 맛있어서, 두그릇 다시 가져다먹었다. 허투루 만들지 않았다. 멸치육수를 진하게 우렸다. 어떻게 이런 집이 아직까지 예전 그 모습 그대로 유지한채 살아남았을까. 나는 신기하기만 하다. 공단 속에 콕 박혀, 오가는 사람만이 오가는 집. 그런 곳에서 떡볶이에서 보여지듯 예전 그 방식을 그대로 고수하는 집. 그런 식당이, 수십년간 노동자들이 청년에서 중년, 장년이 될 때까지 헌 작업복을 입고 아침에 들르고, 점심이 되면 근처 점포의 사장님들이 간단하게 라면에 김밥을 먹고 일어났을 것이다.

 워낙 고립된 입지에서, 주변에 마땅한 경쟁자라도 머리를 들이밀었을까. 주말이면 대기손님이 100팀씩 순번을 찍는 곳에서, 순진하게도 아직 이런 날씬한 가격이라니. 쉽사리 가격을 올리기 어렵다는, 단골을 배려한 방침이었을 것이다. 모든 것이, 모든 것이 가게의 역사, 그리고 이곳을 들러 자리를 채워준 손님들의 사연을 품고 있는 것으로 내겐 보였다.

 내가 맛을 본 것은 단지 5천원에 2인분 하는 떡볶이 한 그릇이었지만 그 한그릇에, 수십년의 점포의 역사가 담기고 사람들의, 새벽과 밤의 별빛도 담겼다. 나는 80년대의 초등학교 앞 정경을 떠올렸고, 또, 불현듯 수십년간 맛 본 떡볶이의 변천사도 떠올랐다.

 그냥, 그 때 그 맛 하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