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하이~볼! 바이! 볼!

“문덕님이 누구냐고 묻네요. ‘문덕’자가 들어간 이름들이 많이 있는 걸 보더니 ‘문덕님은 좋은 분이셨나 봐요’라고 말해요. ‘문덕’자는 왜 붙이고 있냐고 묻는 분들도 있어요”

한 통의 메시지가 왔다. 내게 안부를 전하는 이의 반가운 편지다. 감사한 일이다.

사실 얼마 전 난 내가 속해있던 연맹에서 나왔다. 나와 함께 게임 속 세상을 즐기던 이들이 그리워 찾아간 곳이지만, 예전 같지 않았다. 예전에 내가 알던 이들이 맞나 싶을 정도랄까.

내 입장에서 말한 것이니 그들이 반드시 나쁘다고는 단정 지을 수는 없다. 하지만 확실한 건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생각은 더욱 확고해져만 갔다. 그들과 더는 함께 할 수 없겠다고 말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즐거움은 나누면 배가 된다고. 하지만 내게 그 공간은 더 이상 즐겁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왜 이걸 하고 있나’란 회의감만 점점 더 커질 뿐이었다. 속된 말로 현타(현실 자각 타임)만 더욱 거세게 몰아쳤다.

이곳은 ‘게임을 즐길 내 권리’를 강하게 통제하고 있다. 강력한 규제를 통해 사람들을 통제하고 필요시 처벌하는 것이 그들이 생각하는 리더십이라고 믿는 듯했다.

결국 소통을 위해 마련된 톡방에서는 소위 ‘인싸'(인사이더)라 자칭하는 이들만이 대화를 주도하고, 대다수는 침묵하게 됐다. 다수를 위한 연맹이 아닌 소수만을 위한 연맹이란 느낌이 강하게 든 것도 이 때문이기도 하다.

소수만의 대화창이 되어버린 공간에 더 이상 애정을 쏟고 싶지 않아 졌다. 되도록 많은 이들이 소통에 참여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맹구 짓도 서슴지 않았지만 이제는 소수의 전유물이 되어 버린 곳이란 생각이 들자 정이 뚝 떨어졌다. 그들과 화합해보려 그들에게 먼저 고개를 숙여보기도 했지만, 그들에게 난 ‘안물 안궁(안 물어봤어 안 궁금해)’일뿐이었다.

심지어 그들은 자신들의 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해 ‘전투력’과 ‘기여도’를 기준으로 삼겠다고 공표했으나 사실상 따져보면 측근 정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 일들이 반복되니, 톡방에 글을 쓰기 전에 ‘사람들이 내가 이 말을 쓰면 어떻게 생각할까’란 걱정부터 하게 됐다.

이게 뭐라고…

어느 순간부터 지배층(?)의 눈치를 보고 있는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현타가 오면 회의감이 밀려오게 마련… 사람이 살아가는데 어찌 나를 좋아하는 이들과만 함께할 수 있으랴마는…

그리워졌다. 참여는 늘 열려있고, 의사결정 과정에 누구든 의견을 보탤 수 있었던 그때가…

현실 속에서는 돈과 권력을 가진 이들이 ‘법’과 ‘상식’을 기만하고, 게임 속에서는 ‘돈’과 ‘전투력’을 가진 이들이 다수의 게임 속 유저들을 통제하고 기만하려고 한다… 현실도 게임 속도 모두 날 것의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그들의 말이 곧 법이요 그들의 행위는 어떤 것이든 용납이 되는 세상… 어째 사람들은 자그마한 권력만 쥐어도 이렇게 쉽게 사악한 본성을 드러내는 것인지… 씁쓸하기만 했다.

결국 고민의 고민을 거듭하다 결심했다. 그들과 결별하기로. 작별인사 조차 하지 않았다. 사치라 생각했다. 그렇게 난 소리 소문 없이 그들이 주도하는 세상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찾아온 평온함. 행복함. 현실 속에서 이전보다 더 많이 웃는 나를 발견하게 됐다. 은근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이 나에겐 큰 스트레스였던 것 같다.

평온함을 즐기는 것도 잠시….

미안해졌다

남아있는 문덕팸들에게…

하지만 이번 메시지를 통해 확인한 것은 내 걱정과는 전혀 다른 전개였다. 그들은 ‘문덕’이라는 이름으로 더욱 똘똘 뭉치고 있었다. 강력한 단결력을 기반으로 그들만의 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그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왕국 내 활성화에 기여하면서 문덕팸의 왕국 내 위상을 높여갔다. 이것이 ‘문덕팸’이라고 항변하듯 말이다.

덕택에 왕국에서 ‘문덕’으로 불리던 광화문덕은 떠나고 없지만, ‘문덕’이란 두 글자가 회자되고 있다.

우린 목표가 있다

상식이 통하는 세상. 게임 내에서만이라도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그런 공간을 만들어보자는 우리의 결연한 의지… 그것이 게임과 현생에서 우리를 끈끈하게 이어주고 있다.

우린 늘 고민한다

비록 게임 속 세상이지만… 전투력, 현질이 전부가 아닌, 사람이 전부인 세상을 만들 방법을… 게임 속 세상에서 현실 속 스트레스를 풀고 현생에서는 더욱더 멋진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서로를 응원하고 격려하면서 말이다.

게임을 하다 보면 지루해지기 마련이다. 우린 게임 설계자가 만든 게임 방식에 얽매이지 않고 우리만의 즐거움을 찾으려고 애쓴다. 우리의 만남의 시작이 된 이 게임이 사라지면 우리 역시 뿔뿔이 흩어질 것이란 것을 알고 있어서이기도 하다.

'문덕은 떠났지만, 여전히 문덕은 존재하고 있다'

휴대폰이 울린다

메시지를 보며 사색에 빠져 있는 나를 깨운다. 반가운 선배다.

“밥 먹자! 이날 어때? 널 엄청나게 보고 싶어 하는 후배가 있어서”

사회생활 초년병 시절부터 내게 애정을 갖고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는 첫 단추를 꿰매 주신 분이다. 내겐 은인 같은 선배다.

우려와는 달리 추석 이후 코로나19가 재확산이 되지 않았고, 그 덕택에 선배와 난 지금 마주 앉아 있다.

“이야~ 네가 이렇게 인기가 많은지 정말 몰랐다. 대단해 대단해”

선배는 늘 그렇듯 나를 한껏 치켜세워주셨다. 사실 내가 인기가 많은 것이라기보다는 ‘내가 무얼 해도’ 선배에게 난 좋은 후배여서 일 것이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우린 우리가 가장 즐겁게 보냈던 2009년 어느 날로 돌아가 있었다. 당시 나는 30살, 선배는 33살이었던 그때. 열정적으로 여기저기 누비고 다니며 우리가 생각하는 세상을 만들어보겠다며 용쓰던 그 시절로 말이다.

“안 그래도 선배 만난다고 생각하니 추억이 샘솟더라고요. 예전 선배 A형 간염 걸렸을 때 밤에 선배 입원한 병원 찾아뵀던 때 있잖아요. 제가 입사한 지 얼마 안 돼 어리바리할 때 성수동에서 봤던 선배의 카리스마 넘쳤던 모습도 떠올랐구요”

11년이 지나 흰머리가 희끗희끗해진 지금의 내 모습과는 달리, 선배의 모습은 그 당시 그대로여서 난 마치 서른 살이 된 기분이었다.

이제 입사한 지 몇 개월 안된 후배라는 분 앞에서 선배는 입이 마르지 않도록 내 칭찬을 이어가셨다. 선배에게는 그저 한없이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운 후배 인양.

“너 책이 후배들 글쓰기 교본이라고 하더라. 책 더 내야지”

벌써 5년 전이다. 글쓰기 책을 낸 적이 있다. SNS에 글쓰기 관련 콘텐츠 페이지를 운영했는데, 운이 좋아 구독자가 많아졌고 한 출판사 기획팀장님의 제안으로 출간까지 하게 됐다.

2년 여 간의 집필 과정을 거쳐 책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지만, 3천 부를 끝으로 절판시켰다. 내겐 내 모든 것을 쏟아부어 만든 하나의 작품이었지만 출판사에는 그만큼의 애정이 없어 보였다.

“ㅎㅎㅎ 선배 때가 오겠죠”

“네가 이 업계를 떠났어도 이곳에선 너의 존재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아”

'나는 업계를 떠났지만, 내 이름은 그곳에 여전히 남아있다'

우리가 이날 찾은 광화문역 8번 출구

광화문역 인근 포시즌 호텔 뒤편에 위치한 2층 고깃집, ‘화로담’에서 맛본 ‘닭 목살’과 ‘하이볼’도 내겐 그러한 존재다.

일러스트 = 헤럴드경제 이주섭


2년 전 이곳에 처음 왔을 때 닭 목살이란 생전 처음 들어보는 고기, 그리고 그것을 직접 구워 먹으라며 사장님이 내어주신 자그마한 화롯불, 아울러 환상궁합이니 꼭 한번 맛봐야 한다며 선배가 시킨 울퉁불퉁하게 생긴 잔에 담긴 누르끼리한 음료(?) 하이볼.

하이볼은 위스키를 섞은 일종의 칵테일인데, 시원하면서도 알코올의 알싸함, 그리고 청량한 상콤함이 더해져 매력적이다. 제조법은 어렵지 않지만 배합이 중요하다. 얼음을 채운 글라스에 위스키를 소량 넣고 여기에 탄산수나 음료를 부어 만든다. 레몬이나 라임을 넣어 상큼한 맛을 더할 수 있다.

첫 만남의 기억은 요상했지만 닭 목살의 부드러운 고소함에 상콤한 하이볼의 환상궁합은 내 마음속 깊이 자리하고 있다.

‘그날 마신 하이볼은 내 몸(?)을 떠났지만, 내 마음속엔 하이볼이 남아있다’

일러스트 = 헤럴드경제 이주섭